-조선시대 248

김구의 시

김구(金絿, 1488-1534)는 중종 때의 문신이며 서예가다. , , 등에 보면, 자는 대유(大柔)이고 호는 자암(自庵)이며 본관은 광주(光州)로 김굉필의 문인이다. 16살에 한성시(漢城試)에 장원하고 20살에 사마시에 장원했으며, 24살에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홍문관 수찬, 이조좌랑 등을 거쳐 사간원 헌납, 홍문관 응교를 지냈다. 30살에 우승지,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고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등과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였다. 기묘사화로 경상도 개령(開寧)에 유배되었다가 남해로 옮겨 13년간 절도(絶島)에 안치되었다. 다시 전라도 임피(臨陂)로 옮겼다가 2년 후 석방되어 고향 예산으로 돌아왔으나 부모의 추복(追服)을 입고 애통해 하다가 이듬해 죽었다. 문장이 기걸(奇傑)하고 음률을 ..

-조선시대 2020.08.21

신광한의 시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은 중종,명종 때의 문신이다. 과 , 등을 보면, 자는 한지(漢之)이고 호는 기재(企齋) 또는 낙봉(駱峰)이며 본관은 고령으로 신숙주의 손자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5살에 공부를 시작하여 27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홍문관 부수찬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했다. 35살에 조광조 등과 함께 신진사류로서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도승지 등이 되었으나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삭직되었다. 15년 동안 여주에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55살에 대사성으로 복직되어 형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형조,이조판서가 되고, 노성숙유(老成宿儒)로 오래 문형(文衡)을 맡았다. 을사사화에 소윤(小尹)에 속하여 공을 세우고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해..

-조선시대 2020.08.21

송순의 시

송순(宋純, 1493-1583)은 중종․명종 때의 문신이다. 과 , 의 연보 등에 의하면, 자는 수초(遂初)이고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俛仰亭)이며 본관은 홍주 신평(新平)이다. 21살에 진사가 되고 박상(朴祥)과 송세림(宋世琳)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27살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 사간원 정언 등을 거쳐 49살에 대사간이 되었다. 명종 즉위 후에 중국에 다녀왔고, 개성 유수가 되어 서경덕과 교유했다. 58살에 대사헌,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죄인의 자제를 기용했다는 탄핵을 받고 서천(舒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선산부사를 지낸 후 고향으로 돌아가 면앙정에서 후배들과 시를 지었다. 66살에 전주부윤, 나주목사, 한성부윤 등을 역임하고 77살에 우참찬으로 치사하여 고향으로 돌..

-조선시대 2020.08.21

성수침의 시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은 중종․명종 때의 학자다. 과 에 의하면, 자는 중옥(仲玉)이고 호는 청송(聽松)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조광조의 문인이고 성혼(成渾)의 아버지다.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처형되고 선비들이 화를 당하자 두문불출하여 학문에 전념했다. 49살에 후릉(厚陵)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처가가 있는 파주의 우계(牛溪)로 은거하였다. 그 후 주부, 현감 등의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키가 크고 골격이 빼어났으며 성품이 중후하고 담박하여 명리를 초개같이 여겼다. 효성스러웠고 몸을 닦아 학문과 교육에 힘썼으며 글씨를 잘 썼다. 시조 3수가 전한다. 이려도 태평성대(太平聖代) 저려도 성대태평(聖代太平) 요지일월(堯之日月)이요 순지건곤(舜之乾坤)이로다. 우리도 ..

-조선시대 2020.08.21

이언적의 시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중종․명종 때의 문신․학자다. 과 에 의하면, 자는 복고(復古)이고 호는 회재(晦齋)이며 본관은 경주다. 23살에 생원이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이조정랑, 장령, 밀양부사 등을 거쳐 40살에 사간이 되어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 일당에 의해 파직되었다. 경주 북쪽 자옥산(紫玉山)에 우거하며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7년 뒤 김안로가 숙청되자 다시 벼슬에 나와 교리, 응교를 거쳐 전주부윤으로 선정을 펴고 병조참판에 올랐다. 여러 판서를 거쳐 55살에 좌찬성이 되었고 명종이 즉위하자 공신이 되었다. 모친이 위독하여 사직했으나 윤임(尹任) 일파를 미온적으로 처벌했다는 탄핵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2년 뒤 윤원형(尹元衡)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서(壁..

-조선시대 2020.08.21

허자의 시

허자(許磁, 1496-1551)는 중종,명종 때의 문신이다. 과 에 따르면, 자는 남중(南仲)이고 호는 동애(東厓)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21살에 진사가 되고 28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응교, 전한 등을 거쳐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39살에 김안로(金安老)가 집권하자 양근군수, 황주목사 등 외직으로 돌았다. 김안로 실각 후에 동부승지, 이조참의를 거쳐 44살에 충청도 관찰사가 되고, 형조참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헌, 예조판서, 우참찬이 되었다. 명종 즉위 후에 소윤(小尹)에 가담하여 을사사화로 공신이 되어 양천군에 봉해졌으며, 좌찬성에 올랐다. 54살에 이조판서로 대윤(大尹)의 신원을 주장한 민제인(閔齊仁)의 동생을 현감에 임명하였다가 이기(李芑)의 심복인 ..

-조선시대 2020.08.21

주세붕의 시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중종,명종 때의 문신이고 학자이다. 과 에 따르면, 자는 경유(景游)이고 호는 신재(愼齋)이며 본관은 상주로 경상도 칠원(漆原)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있었고, 28살에 생원이 되어 그해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김안로에게 배척되어 강원도 도사로 좌천되었다가 파면되었다. 이언적에게 심경(心經)의 의심나는 곳을 물었다. 38살에 성균관 전적이 되고 노모의 봉양으로 외직을 구해 곤양군수가 되었다. 47살에 승문원 교리가 되었다가 풍기군수로 나갔다. 백운동 서원을 세워 안향(安珦)을 제향하고 죽계사(竹溪辭)와 도동곡(道東曲)을 지어 사람들에게 부르게 하였다. 명종 즉위 후에 홍문관 직제학, 도승지, 호조참..

-조선시대 2020.08.21

안정의 시

안정(安挺, 1494-?)은 중종 때의 문신이고 서화가이다. 에 의하면, 자는 정연(挺然)이고 호는 죽창(竹窓)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23살에 생원이 되고 기묘년(1519) 현량과에 급제하여 주서가 되었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투옥되자 함께 갇히기를 원하여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검열, 전적 등을 거쳐 양성(陽城) 현감을 지냈다. 신사년(1521)에 안처겸(安處謙)이 남곤, 심정을 제거하려다가 송사련(宋祀連)의 고발로 아버지 안당(安瑭)과 함께 처형된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길주에 유배되었다가 곤양에 이배되었다. 45살에 풀려나 전한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양성현감으로 좌천된 지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렸다. 매화와 대 그림을 잘 그렸고, 거문고와 책과 화초 등으로 즐겼다. 시조 2수가 전한다. 전나귀 ..

-조선시대 2020.08.21

박운의 시

박운(朴雲, 1493-1562)은 중종,명종 때의 학자다. 와 에 의하면, 자는 택지(澤之)이고 호는 용암(龍巖)이며 본관은 밀양으로 선산 사람이다. 27살에 진사가 되어 박영(朴英)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길에 나가기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35살에 상주에 머물던 박상(朴祥)을 찾아뵈었으며, 40살에 낙동강변 용소(龍沼) 옆에 용수암(龍首庵)을 짓고 인근의 자제를 교육했다. 책을 지어 퇴계 선생에게 정정(訂正)을 구하기도 했고,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었어라. 천리(千里) 만리(萬里) 어스름하건마는 가다가 엎어진들 가던 길을 말리야. 그의 시조 네 수가 문집에 전하는데, 그 중 한 수만 뽑았다. 시골에서 학문으로 일생을 보..

-조선시대 2020.08.21

조욱의 시

조욱(趙昱, 1498-1557)은 중종, 명종 때의 학자다. 과 , 를 보면, 그의 자는 경양(景陽)이고 호는 용문(龍門), 우암(愚菴) 등이며 본관은 평양이다. 19살(1516, 중종11)에 생진(生進) 양시(兩試)에 합격했으나 학문에 뜻을 두고 조광조(趙光祖)와 김식(金湜)에게 배웠다. 조광조가 “여러 제자 중에 도를 구하는 데 독실하기는 조욱만한 이가 없다.”고 했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었으나 나이 가장 어려 화를 면했다. 형 성(晟)과 함께 삭녕(朔寧)에 집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다가 선원전(璿源殿) 참봉에 추천되자 어머니 봉양을 위해 나아가 순릉과 영릉 참봉을 지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용문산에 은거하여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56살(1553, 명종8)에 내섬시(內贍寺) 주부에 제수되었고, 다..

-조선시대 202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