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송순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17

송순(宋純, 1493-1583)은 중종․명종 때의 문신이다. <중종․명종실록>과 <연려실기술>, <면앙집(俛仰集)>의 연보 등에 의하면, 자는 수초(遂初)이고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俛仰亭)이며 본관은 홍주 신평(新平)이다. 21살에 진사가 되고 박상(朴祥)과 송세림(宋世琳)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27살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 사간원 정언 등을 거쳐 49살에 대사간이 되었다. 명종 즉위 후에 중국에 다녀왔고, 개성 유수가 되어 서경덕과 교유했다. 58살에 대사헌,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죄인의 자제를 기용했다는 탄핵을 받고 서천(舒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선산부사를 지낸 후 고향으로 돌아가 면앙정에서 후배들과 시를 지었다. 66살에 전주부윤, 나주목사, 한성부윤 등을 역임하고 77살에 우참찬으로 치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독서와 시로 소일하였다. 성품이 대로(大路)를 걸어 강유(剛柔)가 적절했으며 과격하거나 무턱대고 따르지 않아서 선비들로부터 존중을 받았다.

 

 풍상(風霜)이 섞어 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黃菊花)를

 금분(金盆)에 가득 담아 옥당(玉堂)에 보내오니

 도리(桃李)야 꽃이온 양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

 

 늙었다 물러가자 마음과 의논하니

 이 님 버리고 어드러로 가잔 말고.

 마음아 너란 있거라 몸만 먼저 가리라.

 

 십년을 경영(經營)하여 초려삼간(草廬三間) 지어내니

 나 한간 달 한간에 청풍(淸風) 한간 맡겨두고

 강산(江山)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퍼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워 무슴하리오.

 

그가 지은 시조는 모두 21수라고 하지만 우리말 원문으로 전하는 것은 많지 않고 게다가 작자가 중복되는 것을 제하면 위의 네 수쯤이다. 그것도 첫째 수인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만이 작자가 밝혀져 있고 나머지는 무명씨 작품으로 가집(歌集)에 전한다. 첫째 수에 대하여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명종 임금이 대궐 동산에 핀 황국화를 꺾어서 옥당관에게 내려주면서 가사(歌詞)를 지어 바치라고 명했다. 옥당관이 갑자기 지을 수가 없었다. 그 때 송순이 재상으로서 총부(摠府)에 번들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빌려서 지어 올렸더니 임금이 보고는 놀라고 기뻐하여 이 가사를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다. 옥당관이 감히 숨기지 못하고 사실대로 대답하니 임금이 큰상을 내렸다고 한다.

첫째 수는 앞의 이야기에 따르면 명종 말년 그가 우참찬일 때 지은 시일 것이다. 초․중장은 사실을 그대로 읊었다. 찬바람 불고 서리 내리는 추운 계절에 비로소 꽃을 피우는 황국화를 좋은 화분에 담아 홍문관에 보내준 사실을 그대로 직서하고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음미하게 한다. 종장에서 따뜻한 봄날에 흐드러지게 피는 복사꽃과 오얏꽃을 들어서 추위를 무릅쓰고 피는 국화에 대비시키고, 국화를 보내준 임금의 마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겠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봄날을 즐기는 꽃같이 되지 말고 추위를 이기는 꽃처럼 지조 있는 신하가 되라는 격려인 줄 알겠다는 것이다.

둘째 수는 <면앙집>에 한문으로 적힌 ‘치사가(致仕歌)’ 3수 중 1수와 뜻이 일치하므로 그가 지은 원시(原詩)일 것이다. 그가 77살에 우참찬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물러갔는데, 그 때 지은 작품이다. 이 시조는 몸과 마음의 대화체로 된 점이 특이하다. 몸이 늙어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마음과 의논하니, 마음이 임금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느냐며 연군(戀君)의 정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남겨두고 몸만 먼저 고향으로 가겠다고 하여, 임금을 사랑하지만 치사하는 뜻을 운치 있게 표현하였다.

셋째 수는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지은 작품이지만, <면앙집>에 실린 ‘면앙정잡가(俛仰亭雜歌 : 經營兮十年作 草堂兮三間/ 明月兮淸風 咸收拾兮時完/ 惟江山兮無處納 散而置兮觀之)’ 두 수 중 한 수와 뜻이 일치하므로 본디 모습은 이 시조와 비슷할 것이다. 본디 작품은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갔을 때 지었다. 그가 23살에 고향인 담양 기촌(企村)에 면앙정 터를 마련하고 41살에 김안로를 피하여 낙향하여 면앙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전라 관찰사가 되었고, 62살에 선산부사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자연을 즐기고 시를 지었다고 하였으므로 십여 년 동안 공들여서 면앙정을 짓고 만년에 돌아와 거기에서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중․종장에서 공간의 배치가 자못 운치 있게 되었다. 초가삼간이라 했으니 자신과 달과 맑은 바람에게 한 간씩 배정하고 나서 강산은 배경으로 둘러둔다고 했다. 자연을 벗하여 사는 즐거움을 이런 놀라운 공간 배치로 표현하였다.

마지막 수도 그의 행장(行狀)에 실린, 을사사화에 어진 이들이 귀양 감을 한탄하여 지었다는 노래와 초․중장이 일치하므로 그의 작품이 원시(原詩)다. 이 시는 봄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정감을 읊은 것인데, 정국의 파란으로 희생된 선비들에 대한 정서를 암시했다고 하였으니 시인의 의도를 존중해야 될 것 같다. 윤원형 일파가 윤임을 몰아내면서 그가 기용했던 여러 어진 선비를 함께 죄준 것이 을사사화이고, 이 때 이 시를 지어 기생이 노래로 부르자 윤원형 일파인 진복창(陳復昌)이 듣고 의심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꽃이 지는 것은 봄이 가느라고 부는 바람 때문이지 지는 꽃에게는 아무 탓이 없다고 하여, 꽃이 지는 것이 시절 탓이지 꽃 탓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 말을 당시의 정국과 대비시키면 꽃은 윤임 일파로 몰려 희생당한 유관, 유인숙, 권벌, 이언적, 백인걸 등 수많은 인물들을 칭한다 하겠고, 바람은 을사사화라는 정국전환의 회오리를 말하고, 새들은 이를 바라보는 국외자들을 이른 것이라 하겠다. 어쨌건 꽃이 지고 봄이 가는 것을 슬퍼하는 상춘가(傷春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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