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248

성운의 시

성운(成運, 1497-1579)은 중종, 명종, 선조 때의 학자다. 에 실린 졸기와 , 등에 의하면, 자는 건숙(健叔)이고 호는 대곡(大谷)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35살에 생원이 되었으나 기묘사화에 많은 선비가 죽은 이후라 벼슬에 뜻이 없어 처가가 있는 보은 속리산 종곡(鍾谷)에 우거하며 자연의 풍광을 즐기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형인 참봉 성우(成遇)가 을사사화에 진복창의 모함으로 옥사하니 더욱 세상에 뜻이 없어, 조정에서 경명행수(經明行修)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이지함(李之菡), 서경덕, 조식 등 당대의 명현들과 교유하며 학문과 수양에 힘썼다. 자질이 단정하고 기상이 호일(豪逸)하였으며 성품이 순실(淳實)하고 온후하여 금옥과 같았다. 남을 가르치거나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으며..

-조선시대 2020.08.21

홍춘경의 시

홍춘경(洪春卿, 1497-1548)은 중종 때의 문신이다. 과 에 의하면, 자는 명중(明仲)이고 호는 석벽(石壁)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26살에 사마시를 거쳐 32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홍문관 저작랑으로 김안로를 비난했다가 파면되었고, 정언, 부수찬, 전적 등을 역임하며, 논의가 강직하여 강원도사로 좌천되었다. 공조정랑으로 병신년(1536)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성균관 사성이 되고, 김안로가 사사된 후 보덕, 응교, 집의가 되었다. 44살에 예조참의가 되고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후 좌승지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병조 이조참의가 되어 중종의 지문(誌文)을 지었고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51살에 모친상을 당해 여묘를 살다가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두터웠으며 조정에..

-조선시대 2020.08.21

이황의 시

이황(李滉, 1501-1570)은 중종,명종 때의 문신,학자다. 과 의 연보에 의하면, 자는 경호(景浩)이고 호는 퇴계(退溪)이며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12살에 숙부 이우(李堣)에게서 논어(論語)를 배우고,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읽고 좋아했다. 20살에 주역(周易)을 읽고 그 뜻을 궁구하느라 침식을 잊곤 했다. 28살에 진사가 되고, 34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이조좌랑을 지냈다. 40살에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를 거쳐 43살에 성균관 사성이 되어 성묘하러 고향에 왔다가 벼슬을 그만둘 결심을 했다. 홍문관 응교, 전한이 되었으나 장인의 장례로 귀향했다. 단양, 풍기군수가 되었다가 병으로 환향했다. 50살에 퇴계 서쪽에 집을 짓고 이현보와 교유했다. 형 이해(李瀣)가 권신 이기(李芑)의..

-조선시대 2020.08.21

엄흔의 시

엄흔(嚴昕, 1508-1553)은 중종,명종 때의 문신이다. 과 에 의하면, 자는 계소(啓昭)이고 호는 십성당(十省堂)이며 본관은 영월이다. 18살에 생원이 되고, 21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홍문관 정자, 저작 등을 거쳐 정언, 수찬 등을 지냈으며, 김안로를 탄핵했으나 심정(沈貞)과 가까웠다는 무고로 어려움을 당했다. 33살에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고 이듬해 홍문관 전한이 되었다. 35살에 승문원 참교(參校)에 올랐으나 병으로 오래 고생하다가 죽었다. 성품이 뛰어나게 영리하여 문사(文詞)가 날로 더욱 진취되었으므로 동료들의 추앙을 받았다.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선(善)으로 패(敗)한 일 보며 악으로 인 일 본가. 이 두 즈음에 취사(取捨) 아니 명백한가. 진실로 악(惡)된 일 아니하면 자연위선(自然爲善..

-조선시대 2020.08.21

홍섬의 시

홍섬(洪暹, 1504-1585)은 중종,명종,선조 때의 문신이다. 과 에 의하면, 자는 퇴지(退之)이고 호는 인재(忍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영의정 홍언필(洪彦弼)의 아들이며 조광조의 문인이다. 25살에 생원이 되고 28살에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이조좌랑으로 김안로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흥양(興陽)에 유배되었고, 김안로가 실각한 후 석방되었다. 수찬, 부제학, 경기 관찰사, 대사헌 등을 거쳐 49살에 청백리에 뽑혔다. 55살에 좌찬성과 이조판서를 겸했고, 대제학이 되었다. 권신 이양(李樑)의 횡포를 탄핵하여 사직했다가 60살에 판의금부사, 양관 대제학을 지내고, 명종이 죽자 예조판서로 원상(院相)이 되었다. 선조 즉위 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71살에 영의정에 올랐다. 50년 동안 벼슬하여 청렴..

-조선시대 2020.08.21

조식의 시

조식(曺植, 1501-1572)은 중종,명종 때의 학자다. 의 졸기와 , 등을 보면, 자는 건중(楗中)이고 호는 남명(南冥)이며 본관은 창녕으로 경상도 삼가(三嘉)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되 과거공부를 즐겨하지 않았고 성수침(成守琛)을 방문하여 은거할 뜻을 굳혔다. 성리학을 연구하여 자신에게서 돌이켜 구하여 스스로 터득하고 실행하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경의(敬義)를 신조로 하여, 지닌 칼에 ‘안으로 밝은 것은 경(敬)이고 밖으로 끊는 것은 의(義)다.’라고 새겼다. 이언적, 이황과 편지로 교유하였고, 여러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제자들이 많아지자 삼가현에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55살에 단성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면서 “자전(慈殿)은 심궁..

-조선시대 2020.08.21

유희춘의 시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명종,선조 때의 문신이다. 과 에 따르면, 자는 인중(仁仲)이고 호는 미암(眉巖)이며 본관은 문화(文化)로 해남 사람이다. 김안국의 문인으로 26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수찬, 정언 등을 지냈으나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 종성, 은진에 20년간 유배되었다. 함경도 종성 귀양지에서 학문과 교육으로 변방 사람들을 깨우쳤다. 선조 즉위 후 그에게 글을 배운 임금에게 발탁되어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대사간 등을 지냈으며, 63살에 이조참판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지은 는 사료적 가치가 크다. 성격이 소탈하고 경사(經史)에 밝았다. 머리를 고쳐 끼워 옥잠(玉簪)은 갈아 꽂아 연근 지나가되 님이 혼자 과하시니 진실로 과하시면 그에 더한 일이 있을까. 미나..

-조선시대 2020.08.21

김인후의 시

김인후(金麟厚, 1510-1560)는 중종,명종 때의 문신이요 학자다. 과 에 의하면, 자는 후지(厚之)이고 호는 하서(河西)이며 본관은 울산이다. 전라도 장성(長城) 사람으로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22살에 사마시를 거쳐 성균관에서 이황과 함께 공부했고, 31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홍문관 저작, 박사를 거쳐 부수찬이 되었으나,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玉果) 현감으로 나갔다. 인종이 죽자 동궁 시절에 묵죽(墨竹)을 그려주고 을 준 것을 생각하여 애통해 하고 벼슬에 뜻을 버렸다. 명종 즉위 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으로 귀향하여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39살에 순창 점암촌(鮎巖村)에 초당을 짓고 후진을 가르쳤다. 여러 차례 전적, 교리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시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며..

-조선시대 2020.08.21

황진이의 시

황진이(黃眞伊, 1511-1541)는 중종 때 개성의 명기(名妓)다. 김택영(金澤榮)의 과 이능화(李能和)의 에 의하면, 본명은 진(眞)이고 호는 명월(明月)이며 황진사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용모가 빼어나고 서사(書史)에 통했는데 이웃 서생이 사모하다 병이 나서 죽자 마침내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시서음률에 뛰어나서 문인, 학자, 명사, 풍류객들과 교유하여 여러 일화를 남겼는데, 개성유수 송공(宋公), 서화담(徐花潭), 선전관 이사종(李士宗),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종실 벽계수(碧溪守), 지족선사(知足禪師) 등과 사귀었다. 죽을 때 길가에 묻어달라고 해서 대로변에 묻혔으며, 뒤에 임제(林悌)가 추모하는 시조를 지었다. 서화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쳤다. 청산리(靑山裏) 벽..

-조선시대 2020.08.21

양사언의 시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은 명종,선조 때의 문신이요 서예가다. 과 에 의하면, 자는 응빙(應聘)이고 호는 봉래(蓬萊)이며 본관은 청주다. 24살에 진사가 되고 부모의 상을 연이어 당했다. 30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평창군수, 강릉부사, 함흥부윤 등을 역임했다. 성균관 사성, 종부시정(宗簿寺正)을 거쳐 회양군수로 나갔다. 자연을 사랑하여 회양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에 자주 노닐었고, 금강산 만폭동에 그가 쓴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안변부사로 있을 때 지릉(智陵)에 불이 난 책임을 지고 황해도에 유배되었다가 2년 후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시문에 능했고 글씨를 잘 썼다. 태산(泰山)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

-조선시대 202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