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수침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15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은 중종․명종 때의 학자다. <명종실록>과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자는 중옥(仲玉)이고 호는 청송(聽松)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조광조의 문인이고 성혼(成渾)의 아버지다.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처형되고 선비들이 화를 당하자 두문불출하여 학문에 전념했다. 49살에 후릉(厚陵)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처가가 있는 파주의 우계(牛溪)로 은거하였다. 그 후 주부, 현감 등의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키가 크고 골격이 빼어났으며 성품이 중후하고 담박하여 명리를 초개같이 여겼다. 효성스러웠고 몸을 닦아 학문과 교육에 힘썼으며 글씨를 잘 썼다. 시조 3수가 전한다.

 

 이려도 태평성대(太平聖代) 저려도 성대태평(聖代太平)

 요지일월(堯之日月)이요 순지건곤(舜之乾坤)이로다.

 우리도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놀고 가려 하노라.

 

 천지대(天地大) 일월명(日月明)하신 우리의 요순성주(堯舜聖主)

 보토(普土) 생령(生靈)을 수성(壽城)에 거느리샤

 우로(雨露)에 패연홍은(霈然洪恩)이 급금수(及禽獸)를 하셨다.

 

 치천하(治天下) 오십년에 부지(不知)왜라 천하사(天下事)를

 억조창생(億兆蒼生)이 대기(戴己)를 원하느냐.

 강구(康衢)에 문동요(聞童謠)하니 태평(太平)인가 하노라.

 

세 수 모두 태평성대를 찬양하고 있다. 그가 살았던 시절이 태평성대가 아니었으므로 스스로 은거하였던 것인데, 이렇게 태평성대를 노래했다는 것은 요순시절을 간절히 바랐거나 현실을 외면한 몽상이거나 아니면 현실에 대한 반어적 풍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첫 수에서는 현실이 어떤 상황이건 간에 은거한 자신의 입장에서는 요순시절 같은 태평성대라고 하여 듣기에 따라선 지극히 냉소적이고 무관심한 국외자의 시선을 느끼게 한다. 둘째 수에서도 임금의 권위를 과장하여 추켜세워서 천지와 같이 크고 일월같이 밝아서 온 세상 생명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왕권의 절대성을 한껏 강조한 것이다. 그는 재야의 올곧은 선비였으므로 이런 발언은 조정이나 왕권에 관심을 갖지 않겠다는 내심을 반어적으로 말한 것이라 볼 것이다. 마지막 수는 요임금의 고사를 읊었는데, 요임금이 오십년 동안 다스린 후에 백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거리에 나가 동요를 들었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그 시절이 태평성대였음을 노래하였다. 이는 요순시절을 갈망하는 말이기도 하고 당대가 그런 시절이라고 휩싸 안는 말이기도 하며 어지러운 현실을 풍자하는 국외자의 반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시대를 비관하고 초야에 숨어서 학문에만 전심했던 올곧은 선비가 자신의 시대를 태평성대라고 한 데는 이중적인 묘한 여운이 배어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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