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248

이지란의 시

이지란(李之蘭, 1331-1402)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창업한 여진 출신의 공신이다. 와 을 보면, 본성은 퉁(佟), 본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이고, 여진 천호(千戶) 아라부카의 아들로 고려에 귀화하여 북청에 살면서 이씨의 성과 청해(靑海)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이성계를 따라 왜구를 무찌르는 데 공을 세우고 공양왕 때 지문하부사가 되었다.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일등 공신으로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고, 경상도 절제사, 동북면 도안무사를 지냈으며, 문하시랑평장사로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웠다.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했고, 좌찬성이 되었다. 태조가 영흥에 은퇴하자 그를 시종했으며, 뒤에 전장에서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을 속죄하고자 중이 되었다. 천성이 순후하고 무재(武才)가 있었다고 ..

-조선시대 2020.08.25

조준의 시

조준(趙浚, 1346-1405)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창업하고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에 실린 조준의 졸기를 보면, 호는 우재(吁齋) 또는 송당(松堂)이고 평양 사람이다. 가계(家系)가 훌륭했고, 29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도 안렴사(江陵道按廉使)로 선정을 베푼 뒤 여러 번 옮겨 전법 판서(典法判書)에 이르렀다. 37살에 병마 도통사 최영의 휘하에서 체찰사로 왜구를 토벌했고, 이듬해 밀직제학에 임명되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사헌부 대사헌에 발탁되었다. 이성계, 정도전과 함께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개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47살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 개국 1등 공신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지고 문하좌시중과 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를 겸하였다. 이방원을 세자로..

-조선시대 2020.08.25

정도전의 시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을 일으킨 조선창업의 일등공신이다. 와 을 보면, 호는 삼봉(三峯)이고, 21살에 과거에 합격하여 낮은 벼슬을 지내다가 연이어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를 살았다. 29살에 성균박사가 되어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과 함께 성리학을 강론했다. 친명론을 주장하다가 권신 이인임의 미움을 받아 나주로 유배되었고, 귀양에서 풀려난 후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다. 42살에 동북면 도지휘사였던 이성계를 찾아가 혁명을 모의했다. 그 후 정몽주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정권을 잡자 밀직부사로 임명되어 조준, 윤소종과 함께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혁명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성계..

-조선시대 2020.08.25

원천석의 시

원천석(元天錫)은 고려말에 나서 조선초까지 살았으나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에 의하면, 호를 운곡(耘谷)이라 하였으며, 진사에 급제했지만 고려가 기울어짐을 보고 원주 치악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이색과 왕래하고 시를 주고받으며 시국을 개탄했다. 이방원을 가르친 바가 있어 태종이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야사를 지었는데 자손들이 후환을 두려워하여 태워버렸다고 한다. 시조 2수가 전한다.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턴고. 굽을 절(節)이면 눈 속에 푸를소냐. 아마도 세한고절(歲寒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사군자의 하나인 대의 절개를 세한고절이라 하여 찬양한 것이다. 초장에서는 눈을 맞아서 휘어진 대를 지조 없이 굽었다고 못하는 것처럼 왕조 전환의 시운을 만나 어쩔 수 없이 조선조에 살고 있는 자신..

-조선시대 2020.08.25

이직의 시

이직(李稷, 1362-1431)은 조선 건국을 돕고 초창기의 기초를 다진 공신으로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에 실린 이직의 졸기에 의하면, 호는 형재(亨齋)이고, 본관은 성주로 이조년의 증손자이다. 나이 16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밀직사 우부대언이 되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창업의 3등 공신이 되고, 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서북면 도순문찰리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지의정부사에 올랐다.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이 되고, 명나라에 가서 고명(誥命)을 받고 돌아왔으며, 판사평부사(判司評府事)로서 왕명으로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44살에 이조판서가 되었고, 그 후에 성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우의정이 되어 충녕대군의 세자책봉에 황희..

-조선시대 2020.08.21

맹사성의 시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조선 초기의 체제와 문물을 갖추는 데 기여한 명신(名臣)이다. 에 실린 그의 졸기와 등에 의하면, 호는 고불(古佛)이고 온양 출신이며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27살(우왕1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이 되고 여러 번 승진하여 우헌납이 되었다. 조선 개국 후에 수원판관, 예조정랑을 거쳐 이조참의와 예문관 제학이 되었고, 그 후 대사헌으로 태종의 사위(조준의 아들)인 조대림을 국문했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예조 호조 공조 이조 판서를 두루 거치고 예문관 대제학,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가 되었다가 68살에 우의정에 올랐고, 72살에 좌의정이 되었으며 76살에 치사했다. 을 감수했고 를 지어 바쳤다. 사람됨이 조용하고 간편하며 청렴하여 청백리에 뽑혔다. 선비를 ..

-조선시대 2020.08.21

길재의 시

길재(吉再, 1353-1419)는 고려에 의리를 지켜 조선에 벼슬하지 않고 후진양성에 힘써 성리학의 학통을 김숙자(金叔滋)에게 전하여,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에게 이어지게 한 사람이다. 과 에 의하면, 호는 야은(冶隱)이고 경상도 선산 사람이다. 18살에 개경에서 이색과 정몽주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생원시와 사마시를 거쳐 34살(우왕1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박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37살(창왕1년)에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이듬해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선 정종 때 세자 이방원이 불러 왕이 태상박사를 삼았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사양하고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의 시조 1편이 전한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

-조선시대 2020.08.21

최덕지의 시

최덕지(崔德之, 1384-1455)는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이다. 와 에 보면, 호는 연촌우수(烟村迂叟)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태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사관을 거쳐 삼사(三司)의 벼슬을 역임했다. 함양, 김제 등의 군수를 지내고 남원부사가 되었다가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으로 물러나 당호(堂號)를 존양(存養)이라 하고 학문을 연구했다. 문종이 불러서 예문관 직제학을 삼았으나 이듬해 늙었다며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선비들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기미를 알고 몸을 보전하였다며 그의 지혜와 학문과 절개를 칭송했다.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청산이 적요(寂寥)한데 미록(麋鹿)이 벗이로다. 약초에 맛들이니 세미(世味)를 잊을로다. 벽파(碧波)로 낚싯대 둘러메고 어흥(漁興)겨워 하노라. 이 시는 아마 남원부..

-조선시대 2020.08.21

하위지의 시

하위지(河緯地, 1387-1456)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과 등에 의하면, 세종 때 문과에 장원하여 집현전 교리를 지냈고 를 상정하는 데 참여했다. 문종 때에 수양대군을 보좌하여 편찬에 참여했다. 단종 즉위 후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선산(善山)으로 물러갔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간곡히 불러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받은 녹봉은 먹지 않고 저장해 두었다. 성삼문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과묵하였으며 공손하고 예에 밝았다. 시조 한 수가 전한다. 객산문경(客散門扃)하고 풍미월락(風微月落)할 제 주옹(酒甕)을 다시 열고 시구(詩句)를 흩부르니 아마도 산인득의(山人得意)는 이뿐인가 ..

-조선시대 2020.08.21

황희의 시

황희(黃喜, 1363-1452)는 조선 초기 왕권과 문물제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명신이다. 와 에 실린 황희의 졸기에 의하면, 호는 방촌(尨村)이고 본관은 장수이다. 고려말에 벼슬에 나가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태조가 개국한 후에 세자 우정자가 되고 태종 때에는 이조정랑이 되었다. 태종의 신임을 받아 민무구, 민무질 등을 제거하였고, 47살에 참지의정부사와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지의정부사와 대사헌을 거쳐 다음해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냈다. 병으로 위급해 지니 태종이 어의를 명해 치료하고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치게 하였다. 이후 세자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평안도 도순문사로 나갔고, 다시 판한성부사가 되었으나 세자의 폐위와 함께 서인이 되어 교하로 폄출되었다가 남원으로 옮겨졌다. 세종 즉위 후..

-조선시대 202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