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248

송인의 시

송인(宋寅, 1516-1584)은 중종의 사위다. 의 졸기와 에 보면, 그의 자는 명중(明仲)이고 호는 이암(頤庵)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10살에 중종의 셋째 딸 정순옹주(貞順翁主)에게 장가들어 여성위(礪城尉)가 되었다. 젊어서부터 경학(經學)에 통달하고 예학(禮學)에 익숙하여 이황, 조식, 이민구, 정염, 이이, 성혼 등 당대의 명유들과 교유하였다. 의빈부(儀賓府), 충훈부, 상의원(尙衣院) 등에서 도총관을 역임하였고, 중국사신의 영위사를 맡았다. 풍채가 뛰어나고 사람됨이 단정 순수하며 겸손 근실하였으며 호화로운 환경에서도 가난한 사람처럼 살았다. 시문에 능하였고 글씨를 잘 썼다. 들은 말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 듯이 내 인사(人事) 이러하매 남의 시비 모를로다. 다만지 손이 성하니 잔 잡기..

-조선시대 2020.08.21

노수신의 시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명종,선조 때의 문신이요 학자다. 에 실린 졸기와 , 등에 의하면, 자는 과회(寡悔)이고 호는 소재(蘇齋)이며 본관은 광주(光州)다. 이연경(李延慶)의 사위로 학문을 배웠으며, 이언적(李彦迪)과 학문을 토론했다. 29살에 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 홍문관 수찬 등을 거쳐 퇴계와 함께 사가독서하고, 사간원 정언으로 이기(李芑)를 논핵하여 파직시켰으나, 을사사화에 파직되어 순천에 유배되었다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진도로 옮겨져 19년간 귀양을 살았다. 그 동안 이황, 김인후, 이항, 기대승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다. 51살에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2년 뒤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교리, 부제학, 대사헌,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59살에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을 거..

-조선시대 2020.08.21

이후백의 시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은 명종,선조 때의 문신이다. 의 졸기와 , 등에 따르면, 그의 자는 계진(季眞)이고 호는 청련(靑蓮)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어려서 양친을 잃고 15살까지 함양의 백부(伯父)에게서 양육되다가 16살에 할머니를 따라 강진으로 옮겼다. 27살에 진사가 되었다. 벼슬에 뜻이 없어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등 후진을 가르쳤고,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과 교유했으며, 할머니의 상을 치렀다. 36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 홍문관 응교, 전한 등을 거쳤고, 50살에 명나라에 다녀와 도승지, 대사헌, 부제학,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다시 명나라에 주청사로 가서 선조의 종통(宗統)을 바로잡은 공으로 연양군(延陽君)에 추봉되었다, 대사간, 이조판서,..

-조선시대 2020.08.21

이숙량의 시

이숙량(李叔樑, 1519-1592)은 명종,선조 때의 학자다. 과 , 과 등을 보면, 자는 대용(大用)이고 호는 매암(梅巖)이며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이현보(李賢輔)의 막내아들이다. 이황(李滉)에게 배워 학문이 깊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25살(1543, 중종38년)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을 지어 여러 고을에 알렸다. 부모구존(父母俱存)하시고 형제무고(兄弟無故)함을 남에게 이르되 우리 집이 갖다터니 어여쁜 이내 한 몸은 어디 갔다가 모르뇨. 부모님 계신 제는 부몬 줄을 모르더니 부모님 여윈 후에 부몬 줄 아노라. 이제사 이 마음 가지고 어디다가 베푸료. 지난 일 애닯지 마오..

-조선시대 2020.08.21

노진의 시

노진(盧禛, 1518-1578)은 명종,선조 때의 문신이다. 과 , 등을 보면, 자는 자응(子膺)이고 호는 옥계(玉溪)이며 본관은 풍천(豊川)으로 경상도 함양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 노우명(盧友明)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나 6살에 부친을 잃었다. 20살에 생원이 되고 29살(1546, 명종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김인후, 노사신, 기대승 등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전적, 예조좌랑 등을 거쳐 35살에 모친봉양을 위해 자청하여 지례(知禮)현감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혔다. 부교리, 이조좌랑, 교리 등을 거쳐, 42살에 사헌부 장령, 사인, 집의 등을 지내고, 홍문관 직제학, 형조참의, 우부승지가 되었다. 47살에 모친을 모시고자 사직하니 왕이 진주목사를 시켰고, 50살에 이조참의가 되었다. 선조 즉위년에 ..

-조선시대 2020.08.21

박계현의 시

박계현(朴啓賢, 1524-1580)은 중종,명종,선조 때의 문신이다. 과 에 의하면, 자는 군옥(君沃)이고 호는 관원(灌園)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20살에 진사가 되고 29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사가독서 했다. 을묘왜변에 경상평사로 나갔다가 곧 수찬, 병조 이조의 좌랑을 거쳐 동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34살에 이조정랑, 부교리, 사헌부 장령 등을 지냈다. 권신 윤원형 집안의 청혼을 거절했다가 만포진 병마첨절제사로 나갔다. 40살에 대사간을 거쳐 대사성, 예조 병조 형조 참의, 도승지,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경기감사가 되었다. 49살에 진위사로 중국에 다녀왔고, 전라감사를 거쳐 예조참판,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 54살에 지중추부사를..

-조선시대 2020.08.21

강익의 시

강익(姜翼, 1523-1567)은 종중,명종 때의 학자다. 과 에 따르면, 그의 자는 중보(仲輔)이고 호는 개암(介菴)이며 본관은 진주로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27살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하기를 싫어하여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지리산 기슭 함양 구동(龜洞)에 전지(田地)를 마련하여 살았다. 44살(명종21년, 1566)에 정여창(鄭汝昌)의 신원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린 33명의 소두(疏頭)가 되었다. 이듬해 천거로 소격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그 해 겨울에 죽었다. 노진(盧禛), 김우옹(金宇顒) 등과 함께 배웠다. 물아 어디 가느냐 갈 길 멀었어라. 뉘누리 다 채와 지내노라 여흘여흘 창해(滄海)에 못 미칠 전이야 그칠 줄이 있으랴. 시비(柴扉)에 개 짖는다 이 산촌에 그 뉘 오리. 댓잎 푸른데..

-조선시대 2020.08.21

허강의 시

허강(許橿, 1520-1592)은 중종,명종,선조 때의 학자다. 과 허목(許穆)이 지은 에 의하면, 자는 사아(士牙)이고 호는 송호(松湖) 또는 강호처사(江湖處士)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을 원하지 않았다. 을사사화에 아버지 허자(許磁, 1496-1551)가 함경도 홍원(洪原)에 귀양 갔다가 죽자 40년 동안 방랑하면서 아버지가 편찬하던 을 완성했다. 조정에서 내린 전함사(典艦司) 별제(別提)를 사양하고 임진왜란 때 토산에 피란했다가 죽었다. 성품이 고결했다. 봉황성(鳳凰城) 돌아들어 고향 어디메오. 팔도하(八渡河) 가에 갈잎에 자리 보아 삼경(三更)에 겨우 든 잠을 여울 소리에 깨과라. 난하(灤河) 서릿달 고죽촌(孤竹村) 눈 진 길에 만리(萬里)를 돌아드니 제향(帝鄕..

-조선시대 2020.08.21

기대승의 시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은 명종,선조 때의 문신이요 학자다. 의 졸기와 , 등에 따르면, 그의 자는 명언(明彦)이고 호는 고봉(高峰)이며 본관은 행주(幸州)로 나주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23살에 생진 양과에 올라 사림에 이름이 났다. 어려서 모친을 잃었고 29살에 부친을 여의었다. 32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고 사가독서 하였다.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을 토론하였고 뒤에 서신으로 사단칠정변론을 계속하였다. 예문관 검열, 승정원 주서 등이 되었으나 신진사류의 영수로 지목되어 삭직되었다. 권신 이양(李樑)이 물러난 뒤 수찬, 전적, 이조정랑, 교리, 장령 등을 지냈다. 선조 즉위 후에 사헌부 집의, 전한이 되어 조광조와 이언적의 추증을 건의했고, 우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으나 영..

-조선시대 2020.08.21

임진의 시

임진(林晋, 1526-1587)은 명종,선조 때의 무신이다. 과 에 의하면, 자는 희선(希善)이고 본관은 나주로 임제(林悌)의 아버지다. 21살(1546,명종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법성포 만호, 영변부사, 창원방어사 등을 거쳐, 제주목사 겸 수륙군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44살에 전라우수사가 되어 흑산도 수적을 포획했고, 48살에 경상좌도병마사, 회령부사가 되었으나, 기첩(妓妾) 때문에 역마를 거느리느라 역졸을 침해한 사건으로 추고를 당하였다. 58살에 장흥부사, 오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청렴한 생활로 영변, 창원, 제주에 청정비(淸政碑)가 있다. 활 지어 팔에 걸고 칼 갈아 옆에 차고 철옹성변(鐵瓮城邊)에 통개(筒箇) 베고 누웠으니 보완다 보아라 소리에 잠 못 들어 하노라. 영변 조에 “고..

-조선시대 202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