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김구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19

김구(金絿, 1488-1534)는 중종 때의 문신이며 서예가다. <중종실록>, <해동명신록>, <국조인물고> 등에 보면, 자는 대유(大柔)이고 호는 자암(自庵)이며 본관은 광주(光州)로 김굉필의 문인이다. 16살에 한성시(漢城試)에 장원하고 20살에 사마시에 장원했으며, 24살에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홍문관 수찬, 이조좌랑 등을 거쳐 사간원 헌납, 홍문관 응교를 지냈다. 30살에 우승지,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고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등과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였다. 기묘사화로 경상도 개령(開寧)에 유배되었다가 남해로 옮겨 13년간 절도(絶島)에 안치되었다. 다시 전라도 임피(臨陂)로 옮겼다가 2년 후 석방되어 고향 예산으로 돌아왔으나 부모의 추복(追服)을 입고 애통해 하다가 이듬해 죽었다. 문장이 기걸(奇傑)하고 음률을 알았으며 글씨에 뛰어나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는데, 세상에서 그가 인수방(仁壽坊)에 살았으므로 인수체라 하였다. 시조 5수가 전한다.

 

산수(山水) 내린 골에 삼색도화(三色桃花) 떠 오거늘

내 성은 호걸(豪傑)이라 옷 입은 채 들오이다.

꽃으란 건져 안고 물에 들어 솟과라.

 

태산(泰山)이 높다 하여도 하늘 아래 뫼이로다.

하해(河海) 깊다 하여도 땅 위에 물이로다.

아마도 높고 깊을손 성은(聖恩)인가 하노라.

 

여기를 저기 삼고 저기를 예 삼고자

여기 저기를 멀게도 삼길시고

이 몸이 호접(蝴蝶)이 되어 오명가명하고자.

 

첫째 수는 낭만적 풍치가 물씬 풍겨나는 작품으로 산수자연에 취한 흥을 표현하였다. 초장에는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의 이미지를 살려서 물 위에 떠 흐르는 색깔이 다른 복숭아꽃을 제시하였다. 중장에는 자신의 성질이 호걸스러워서 옷 입은 채로 물 속에 뛰어들었다는 것인데, 도화의 시각 이미지에게 반응하는 역동적 행동의 직서(直敍)다. 종장에서 꽃을 건져 안고서 물에서 솟구치는 동적 이미지가 신선하고도 힘차게 표현되었다. 일상적 현실에서 있을 것 같지 않은 산수 자연에 취한 낭만적 흥취를 역동적으로 잡아낸 특이하고도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된다.

둘째 수는 높은 산 깊은 물보다 더 높고 깊은 것이 임금의 은혜라는 말로 임금의 덕을 칭송한 노래다. 악장 <감군은(感君恩)>과 유사한 송축가다. 임금에 대한 일방적 칭송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조정에서 신진사류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겠다는 이상에 부풀어 있던 시절과 관련될 듯하다. 초장은 태산이 높아도 하늘 아래라는 말은 그 보다 더 높은 게 있다는 뜻이고,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시조에도 나오는 구절이다. 중장은 강과 바다가 깊지만 그것도 결국은 땅위에 있다고 하여 이보다 더 깊은 게 있다는 뜻을 감추고 있다. 종장에서 태산과 하해보다 높고 깊은 것이 임금의 은혜라고 하였으니 임금의 포용력을 극대화하여 자신들의 이상이 펼쳐지기를 소망한 것이라 하겠다.

셋째 수는 유배지의 답답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장자(莊子)의 나비 꿈으로 나타난 작품이다. 남해에 안치되었을 때는 그 답답함이 더했을 것이다. 초장에는 여기와 저기를 바꾸어서 고향의 부모형제와 보고 싶은 사람을 맘껏 보고 싶은 소망을 드러내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공간교체를 바랐을까. 중장에는 현실을 생각하고는 떨어져 있는 두 공간이 서로 멀게도 생겼다고 한탄하였다. 현실에서는 결코 갈 수도 볼 수도 없는 고향의 부모형제를 생각하고 절망하는 시인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종장에서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이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꿈속의 나비가 되어 마음대로 오고가고 싶다고 하였다. 장자의 나비 꿈은 자아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었지만 여기서는 나비가 무한한 자유의 형상화란 점이 다르다. 그는 유배 중에 부모의 상을 당했지만 갈 수 없었고 석방된 후에 추복(追服)을 입고 애통해 하다가 병이 나서 죽었으니 유배지에서 얼마나 부모가 보고 싶었겠는가. 

 

나온댜 금일(今日)이야 즐거운댜 오늘이야

고금왕래(古今往來)에 유(類) 없는 금일(今日)이여

매일(每日)에 오늘 같으면 무슨 성이 가시리.

 

오리 짧은 다리 학의 다리 되도록애

검은 까마귀 해오라기 되도록애

향복무강(享福無疆)하사 억만세(億萬歲)를 누리소서.

 

그가 옥당에서 숙직할 때 복장을 정돈하고 밤새 책을 읽는데, 중종이 방문하여 술상을 들여오게 하고 군신의 예를 버리고 친구처럼 술을 권하다가 글 읽는 목소리가 청아하다며 노래를 청한다. 이리하여 두 곡을 부르니 칭찬하고 노모에게 드리라고 담비털옷을 주었다고 한다. <자암집(自庵集)>에 있는 이런 기록으로 보아 임금의 명에 즉흥적으로 지은 송축가로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고 복을 비는 내용이다.

첫 수는 뜻밖에 임금의 방문에 감격하여 그 은총에 신진사류의 희망을 드러낸 것이다. 초장의 ‘나온댜’는 즐겁구나의 뜻이다. 따라서 임금이 불시에 방문한 일에 감격하여 그 기쁨을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중장에서 이런 일은 고왕금래에 유례없이 드문 일이라고 다시 한번 감동을 드러내었다. 종장에서 임금이 이렇게 젊은 선비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진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현하는 데 무슨 성가시고 어려운 일이 있겠느냐는 희망을 토로하였다. 신진사류가 추진하는 이상국가 실현에 임금이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격려하는 데 대하여 감격한 것이다.

둘째 수는 불가능한 전제를 내걸고서 간절한 소망을 축원하는 전통적 어법에 따라 임금의 복을 빈 송축가다. 이런 어법은 고려가요 <정석가>나 애국가 1절에서도 보이는 익숙한 것이다. 초장의 짧은 오리 다리는 학의 다리처럼 길어질 수가 없는 것이고, 중장의 검은 까마귀도 해오라기처럼 하얗게 될 리가 만무하다. 이렇게 불가능한 전제를 내건 것은 그 소원이 간절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종장에서 임금이 억만년 동안 복을 누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다. 앞의 시조에서 보았듯이, 신진사류를 격려하여 이상국가로 나아가려는 임금이기에 이러한 개혁정치를 계속해서 밀고 나가서 영원토록 복을 누리시라는 기원이요 또한 그것은 그들 신진사류의 희망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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