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19

이조년의 시

이조년(李兆年)은 고려 원종 10년(1269)에 나서 충혜왕 4년(1343)에 죽었다. 그러니까 우탁보다 6년 뒤에 나서 1년 뒤에 죽은 동시대의 후배인 셈이다. 이조년은 호를 매운당(梅雲堂)이라 했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고 벼슬은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열전 이조년 조에 보면, 어려서부터 마음이 굳고 도량이 넓었으며 학업에 전념해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그 능력이 빼어나서 부사(府使)가 사위로 삼기까지 했다고 한다. 충렬왕 때 벼슬에 나갔다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왕위 계승의 알력과 혼란 속에서 죄 없이 유배를 당하기도 하고 13년간 고향에 은거하기도 하다가 충숙왕이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 원나라의 중서성(中書省)에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여 풀려 나오게 하기도 했고, 또 충..

-고려시대 2020.08.25

우탁의 시

우탁은 고려 원종 4년(1263)에 나서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죽었다. 호를 역동(易東)이라고 하였고, 벼슬은 성균좨주(成均祭酒)에 올랐다. 열전 우탁 조에 보면, 등과하여 영해군(寧海郡) 사록(司錄)이 되었는데 민간에서 받드는 무속신앙의 신사(神祠)를 음사(淫祀)라고 깨뜨려서 바다에 쳐넣었다고 했으며, 유교 경전과 역사에 정통하였고 특히 역학(易學)과 점술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주학(程朱學)이 이 땅에 전래되어 이것을 능히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 문을 닫고 이를 연구하여 깨우친 후에 제자들에게 새로운 학문인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쳤다고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충혜왕이 난잡한 행동을 했을 때 도끼와 짚자리를 지고 대궐에 들어가 상소를 했는데, 근신(近臣)이 감히 왕에게 알리지 못..

-고려시대 2020.08.25

이존오의 시

이존오(李存吾, 1341-1371)는 호를 고산(孤山)이라 하고 벼슬은 정언에서 그쳤다. 열전에 의하면, 어려서 부모를 여위었지만 모습이 단정하고 과묵했으며 힘써 공부하고 뜻이 굳었다고 한다. 그를 기른 형이 도적에게 잡혀가서 죽자 여러 달 걸려서 형의 시체를 찾고 관에 고발하여 도적들을 다 잡았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 정몽주 이숭인 정도전 등과 강론하며 교유하였고, 정언이 되어 신돈(辛旽)을 탄핵하되 “요물이 나라를 그르치니 쫓아내지 않을 수가 없다”며 공민왕에게 극간하였다. 그래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었다가 공주 석탄(石灘)에 은둔 중 신돈의 세력이 날로 성하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해 병이 되어 31살로 죽었다. 이존오의 시조 2편을 보자. 바람에 우는 머귀 베어 내어 줄 매오면 해온남풍(..

-고려시대 2020.08.25

이존오의 시

이존오(李存吾, 1341-1371)는 호를 고산(孤山)이라 하고 벼슬은 정언에서 그쳤다. 열전에 의하면, 어려서 부모를 여위었지만 모습이 단정하고 과묵했으며 힘써 공부하고 뜻이 굳었다고 한다. 그를 기른 형이 도적에게 잡혀가서 죽자 여러 달 걸려서 형의 시체를 찾고 관에 고발하여 도적들을 다 잡았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 정몽주 이숭인 정도전 등과 강론하며 교유하였고, 정언이 되어 신돈(辛旽)을 탄핵하되 “요물이 나라를 그르치니 쫓아내지 않을 수가 없다”며 공민왕에게 극간하였다. 그래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었다가 공주 석탄(石灘)에 은둔 중 신돈의 세력이 날로 성하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해 병이 되어 31살로 죽었다. 이존오의 시조 2편을 보자. 바람에 우는 머귀 베어 내어 줄 매오면 해온남풍(..

-고려시대 2020.08.25

정몽주의 시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고려왕조와 운명을 함께한 충신이다. 의 연보에 의하면, 그는 19살 때의 부친상과 10년 후 모친상에 삼년씩 시묘를 살았다. 24살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에 수찬이 되었고, 그를 뽑아준 김득배(金得培)가 간신에게 해를 입어 죽자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동북면의 여진족 정벌에 종사관으로 참여하였고, 성리학에 정통하여 성균박사로 강설했는데, 대사성 이색이 "정몽주의 논리는 횡설수설이라도 이치에 다 맞으니 동방 이학의 조(祖)로 해야겠다."는 칭찬을 받았다. 36살에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 후 경상도 안렴사를 거쳐 예문관 직제학,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명나라 사신을 죽인 사건이 일어나 다들 명나라에 가기를 꺼릴 때 그가 가서 해명하고 돌아왔다. 권신 이인임의 친..

-고려시대 2020.08.25

이색의 시

이색(李穡, 1328-1396)은 고려말의 삼은(三隱)으로 대표적인 문신의 한 사람이다. 열전과 등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14살에 성균시에 합격하였다. 젊어서 아버지 이곡(李穀)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그 곳 국자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장원급제했으며 이제현의 문인이 되었다. 공민왕의 정치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유교에 의한 삼년상 제도를 실시하고 신돈의 개혁에 협조하여 교육과 과거제도를 개선하였다. 공민왕의 신임으로 해마다 승진하여 38살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와 보문관 대제학이 되고 이듬해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었다. 40살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정몽주(鄭夢周)를 비롯한 경술지사(經術之士)들을 교관으로 삼아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토론하였으며 과거에도 이를 반영하였다. 이로..

-고려시대 2020.08.25

서견의 시

서견(徐甄)은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의 문신이다. 와 에 의하면, 호는 여와(麗窩)이고 본관은 이천(利川)이며 안향(安珦)의 문인이다. 공양왕 3년(1391)에 사헌장령(司憲掌令)이 되어 대사헌 강회백(姜淮伯) 등과 함께 조준(趙浚)과 정도전(鄭道傳)을 탄핵하였는데, 정몽주가 살해되자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장류(杖流)되었다. 조선 개국 후 풀려나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나 금천(衿川)에 은거하며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시조 1수가 전한다. 암반(岩畔) 설중고죽(雪中孤竹) 반갑고도 반가워라. 묻노라 고죽(孤竹)아 고죽군(孤竹君)이 네 어떤 인가. 수양산(首陽山) 만고청풍(萬古淸風)에 이제(夷齊) 본 듯하여라. 서견의 생몰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금천현(衿川縣) ..

-고려시대 2020.08.25

최영의 시

최영(崔瑩, 1316-1388)은 고려말의 명장이요 충신이다. 열전에 보면, 그는 몸집이 크고 힘이 세었는데 공민왕 때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였고, 압록강에 이르는 서북 지역의 영토를 수복하였으며,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탈환한 공으로 벽상공신이 되었다. 나라 안의 반란을 여러 번 진압하였으나, 신돈의 모함으로 공훈이 삭탈당하기도 하였다. 신돈이 처형된 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우왕 때 삼남의 왜구를 무찔러 철원부원군에 봉해지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자 권력을 전단하고 사욕을 채웠던 이인임 일파를 몰아내고 능력과 기강으로 정방(政房)을 바로잡았다.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요동을 귀속시키려 하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군..

-고려시대 2020.08.25

성여완의 시

성여완(成汝完, 1309-1371)은 호를 이헌(怡軒)이라 하였고,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에 있는 그의 졸기(卒記)에 보면, 27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충주 목사 등을 거쳐 공민왕 때 민부상서(民部尙書)가 되었지만 신돈(辛旽)이 몰락할 때 그 일당으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그 후 우왕 때 정당문학에 올라 창녕부원군에 봉해졌지만,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살해되자 고려의 국운이 시들었음을 알고 포천(抱川) 왕방산에 들어가 은둔하였다. 태조가 회유책으로 벼슬을 내렸으나 고사하였다. 그는 성품이 간결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식들을 법도 있게 가르쳤다. 그의 아들은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성석린(成石璘)이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그는 신돈의 개혁 정치에 동참했다가 기존 세력의 반대에 ..

-고려시대 2020.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