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248

이개의 시

이개(李塏, 1417-1456)는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과 의 ‘육신전’에 의하면, 자는 청보(淸甫) 또는 백고(伯高)이고,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이색(李穡)의 증손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저작랑을 지내고,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다. 세조 때 직제학에 이르렀으나 병자년에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죽었다. 몸이 약하고 여위었으나 고문에 태연하였으며, 시문에 능하였다. 시조 한 수가 전한다. 방안에 혔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 타는 줄 모르는고. 우리도 저 촛불 같아야 속 타는 줄 모르도다. 이 시 또한 옥중에서 자신의 심중을 밝힌 작품이다. 다른 사물을 읊어서 정서를 일으키는 흥의 수법과 어떤 사물..

-조선시대 2020.08.21

박팽년의 시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은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과 등에 의하면,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사랑을 받았다. 세조가 즉위하자 경회루 못에 자살하려 했으나 성삼문이 훗날을 기다리자며 말렸다.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으나 조정에 올리는 공문에 신(臣)이라 칭하지 않았고, 다음 해 형조참판이 되어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고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해 잔치하는 자리에서 별운검을 서게 될 성승과 유응부가 세조와 우익(羽翼)을 제거하기로 했으나 당일 장소가 좁아 운검을 폐지하는 바람에 그냥 결행하자는 유응부를 말려서 연기했다가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에게 밀고하여..

-조선시대 2020.08.21

유응부의 시

유응부(兪應孚, ?-1456)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과 , 그리고 남효온의 에 있는 ‘육신전(六臣傳)’ 등을 보면,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키가 크고 용모가 엄장(嚴壯)하며 날래고 활을 잘 쐈다. 무과에 급제하여 세종과 문종의 애중함을 입어서 첨지중추원사를 지냈고, 경원 도호부사와 의주 목사 등을 거쳐 평안도 도절제사를 지냈다. 세조가 즉위하자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는데, 성삼문, 박팽년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여 명나라 사신 초대연에서 별운검(別雲劍)이 되어 세조를 죽이려 했으나 그 날 운검이 폐지되어 계획을 미루었다가 김질(金礩)의 배신으로 잡혀서 고문을 받고 죽었다. 효성이 뛰어났으며 청렴하였고, 세조의 모진 고문에도 태연히 굽히지 않았다. 시조 한 수가 전한다. 간밤에..

-조선시대 2020.08.21

김종서의 시

김종서(金宗瑞, 1390-1453)는 세종 때 6진을 개척하였고 어린 단종을 보필하다가 죽은 문신이다. 과 등에 의하면,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본관은 순천이다. 16살(태종5)에 문과에 급제하여 서른 살에 사간원 우정언을 지내고 44살에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6진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지내고 형조와 예조의 판서를 거쳐 57살에 우참찬이 되었다. 를 개찬하였고, 61살에 좌찬성이 되어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했다. 이듬해(문종1) 우의정에 올라 , 의 편찬을 감수하였고, 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이 되어 황보인 등과 어린 왕을 보필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에 의해 아들과 함께 격살되었다.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신으로 문종의 유명(遺命)..

-조선시대 2020.08.21

원호의 시

원호(元昊)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에 의하면, 자는 자허(子虛)이고, 호는 무항(霧巷) 또는 관란(觀瀾)이며 본관은 원주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고 문종 때에는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수양대군이 권세를 잡자 고향 원주로 퇴거하였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강 맞은편에 집을 지어 당호를 관란(觀瀾)이라 하고, 시나 책을 지으며 아침저녁으로 건너다보고 울며 지내다가 단종이 죽자 3년상을 치렀다. 세조가 호조참의를 제수했으나 끝내 불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간밤에 울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내어다. 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자 나도 울어 녜리라. 이 시는 그가 영월 청령포 서쪽에 오두막을 짓고 단종의 신하로 자처하며..

-조선시대 2020.08.21

왕방연의 시

왕방연(王邦衍)은 세종 세조 때의 사람이나 생몰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에 의하면 그는 세종 때 사람이고, 금오랑(金吾郞)으로 노산군(魯山君, 단종)을 영월까지 압송하고 돌아오면서 냇가에서 방황하다가 느낀 바 있어 시조 1수를 지었다. 이 노래에서 그 사람이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님을 이별한 심정을 울며 흐르는 냇물에 비기어 곡진하게 표현해 내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사실성(寫實性)이 드러나면서도 누구에게나 공감을 줄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 그 울림이 큰 작품이라고 하겠다. 초장은 왕방연이 의금부 도사가 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을 영월로 압..

-조선시대 2020.08.21

유성원의 시

유성원(柳誠源, ?-1456)은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과 의 육신전에 의하면, 자는 태초(太初)이고 호는 낭간(琅玕)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수찬, 대교 등을 역임했다.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의 협박에 못 이겨 공신을 녹훈하는 교서를 쓰고 집에 돌아와 통곡하였다. 세조가 즉위한 후 성균 사예가 되었으나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성삼문이 잡히자 집으로 돌아가 자결했다. 시조 1수가 전한다. 초당(草堂)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꿈에나 보려 하니 문전(門前)에 수성어적(數聲漁笛)이 잠든 나를 깨와라. 이 시조는 단종 복위 사건과는 관련이..

-조선시대 2020.08.21

성삼문의 시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은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과 , 등에 의하면,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이고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21살(세종20)에 문과에 급제하고 서른 살에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했다. 집현전 학사, 수찬 등을 거쳐 경연관으로 세종을 항상 가까이 모셨다. 정음청에서 한글 창제를 위해 당시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13번 찾아가 음운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여러 번 건너가 음운을 연구한 후에 훈민정음을 반포하게 했다. 세종이 만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에도 박팽년 신숙주 최항 이개 등과 함께 배종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집현전 신하들에게 공신의 호를 내리자 모두 순번으로 축하연을 열었..

-조선시대 2020.08.21

소춘풍의 시

소춘풍(笑春風, 1470-1494)은 영흥(永興)의 명기였다.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와 고대본 의 기록에 의하면, 성종은 여러 신하에게 주연을 열 때 매번 여악(女樂)을 베풀었다. 하루는 대궐에 불려 들어온 영흥 기생 소춘풍에게 술을 따르며 새 노래를 지어 문사를 칭찬하라고 명했는데, 금잔에 술을 따라 임금에게 감히 드리지는 못하고 영상 앞으로 나아가 잔을 들고 첫 노래를 불렀다. 그 뜻은 ‘순(舜)도 계시건마는 요(堯)아 내 님인가 하노라.’였다. 그 때 여러 무반이 노하니 임금이 또 노래를 지어 그들의 마음을 풀라고 했다. 소춘풍이 술을 따라 올리며 이르기를 ‘앞 말은 잘못 되었고 씩씩한 무부를 어찌 좇지 않으리오.’라고 했다. 이번에는 문반이 자못 기뻐하지 않았다. 임금이 또 노래로..

-조선시대 2020.08.21

성종의 시

성종(成宗, 1457-1494)은 조선의 제9대 왕으로 이름은 혈(娎)이고 덕종의 둘째 아들이다. 과 행장에 의하면, 5살에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지고 14살에 잘산군(乽山君)에 개봉(改封)되어 이듬해 즉위하였다. 이후 7년간 세조비 정희대비가 수렴청정하다가 1476년부터 친정했다. 즉위한 해에 귀성군 준(浚)을 유배했고, 숙의 윤씨를 왕비로 삼았다가 폐위하여 사사했다. 재위 기간 중에 문운(文運)이 크게 일어나 문화가 개화했고 문물제도가 정비되었다. 을 완성하였고, , , , , 등 많은 서적을 간행했다. 변방을 안정시켰고, 홍문관 확충과 독서당 신설, 양현고 설치 등으로 젊은 학자를 우대하고 교육과 문화의 진흥에 힘썼다. 인재등용에도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를 과감히 발탁하여 신진세력을 형성시켰다..

-조선시대 202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