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신광한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18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은 중종,명종 때의 문신이다. <중종,명종실록>과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등을 보면, 자는 한지(漢之)이고 호는 기재(企齋) 또는 낙봉(駱峰)이며 본관은 고령으로 신숙주의 손자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5살에 공부를 시작하여 27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홍문관 부수찬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했다. 35살에 조광조 등과 함께 신진사류로서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도승지 등이 되었으나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삭직되었다. 15년 동안 여주에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55살에 대사성으로 복직되어 형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형조,이조판서가 되고, 노성숙유(老成宿儒)로 오래 문형(文衡)을 맡았다. 을사사화에 소윤(小尹)에 속하여 공을 세우고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해졌다. 67살에 좌찬성이 되고 70살에 궤장을 받고 문형을 사퇴하였다. 성품이 순후하고 학문이 해박하며 문장에 능하였다. 일처리는 더디었으나 청렴하고 고상하여 세태와 부합되지 않았다.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심여장강(心如長江) 유수청(流水淸)이요 신사부운(身似浮雲) 무시비(無是非)라.

이 몸이 한가하니 따르나니 백구(白鷗)로다.

어즈버 세상명리설(世上名利說)이 귀에 올까 하노라.

 

이 시조는 그가 여주 원형리(元亨里)에 우거하여 독서하던 때에 지은 작품일 것이다. 왜냐하면 조광조와 가까운 신진사류로서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쫓겨나 삼척부사를 지낸 후에 모친상을 당했고, 그 뒤 여주에서 두문불출하며 거기서 일생을 마치려고 하였으니, 그때에 세상 시비를 떠나서 자연 속에 한가히 살기를 바라는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장은 칠언 한시를 대구로 제시하여 토를 단 것으로 이런 형태가 시조로 성립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시조가 한시 구절을 포섭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마음은 긴 강 같으니 흐르는 물은 맑고, 몸은 뜬 구름 같아서 시비가 없도다.”라고 하여, 몸과 마음을 자연의 변화 속에 맡겨서 따지지 않겠다고 하였다. 중장은 이 시조의 주지(主旨)를 드러낸 것이다. 자연 속에서 한가하고 자유롭게 살겠다는 뜻이고, 그 상관물이 흰 갈매기다. 종장은 이러한 생활을 종신토록 계속하겠다는 자세를 밝힌 것으로 세상의 명예나 이익에 대한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그는 성품이 고인(古人)의 도(道)를 좋아하고 세상사에 우활하여 이익을 따지지 않았다 하니 그의 본 모습이 드러난 작품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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