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248

김성원의 시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은 선조 때의 문인이다. 와 등에 의하면, 자는 강숙(剛叔)이고 호는 서하당(棲霞堂) 또는 인재(忍齋)이며 본관은 광주(光州)다. 7살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14살에 결혼하였으며, 하서(河西) 김인후(金仁厚)와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등에게 배웠다. 생원에 올랐으나 학문에 전념했다. 36살에 광주 서석산(瑞石山) 밑에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지어놓고 임억령(林億齡), 기대승(奇大升), 정철(鄭澈), 고경명(高敬命) 등과 시문을 지으며 교유했으며 정철이 그를 위하여 가사 을 지었다. 56살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침랑(寢郞)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제원찰방(濟源察訪)이 되었다. 임란이 일어나자 동복(同福)현감으로 각지의 의병들과 제휴하여 백성들을 보호하였고, 정..

-조선시대 2020.08.21

권호문의 시

권호문(權好文, 1533-1587)은 명종ㆍ선조 때의 학자다. 의 연보와 에 따르면, 자는 장중(章仲)이고 호는 송암(松巖)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15살부터 퇴계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30살에 진사가 되었으나 18살에 부친을 잃고 33살에 모친을 잃어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퇴계는 그를 산림 선비의 풍이 있다고 했다. 부모의 산소가 있는 마감산(麻甘山) 아래에 종모암(終慕庵), 연어헌(鳶魚軒)을 짓고 부모를 영모(永慕)하고 천지의 도를 궁구하며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38살에 관물당(觀物堂)을 짓고 기거하며 강학했다. 유성룡(柳成龍),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 권문해(權文海) 등과 교유하고 학문을 토론했으며, 퇴계의 문집 간행에 힘썼다. 42살에 청성정사(靑城精舍)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조선시대 2020.08.21

고응척의 시

고응척(高應陟, 1531-1606)은 명종ㆍ선조 때의 문신이요 학자다. 과 에 보면, 그의 자는 숙명(叔明)이고 호는 두곡(杜谷)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12살부터 을 배우기 시작하여 19살(1549)에 사마시에 합격했고, 학문연구에 전념하라고 상주목사 신잠(申潛)이 후원했다. 31살(1561,명종16)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함흥 교수가 되었다. 다음해 사직하여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여 의 여러 편을 시조로 읊기도 했다. 40살에 회덕(懷德) 현감이 되었으나 다음해 부친상을 당하였고 선산 두곡(杜谷)에 살면서 두곡을 호로 삼았다. 45살에 강원도사가 되었으나 모친의 병으로 부임치 않았다. 이듬해 사도시(司導寺) 첨정에서 성균 직강이 되고 다음해 이후백(李後白)의 추천으로 승문원 교검이 되었다. 임..

-조선시대 2020.08.21

이제신의 시

이제신(李濟臣, 1536-1584)은 명종,선조 때의 문신이다. 과 에 따르면, 자는 몽응(夢應)이고 호는 청강(淸江)이며 본관은 전의(全義)다. 23살에 진사가 되어 29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예문관 검열, 전적을 거쳐 형조정랑, 감찰을 역임하고 명나라에 다녀왔다. 예조정랑,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여 편찬에 참여했다. 35살에 울산부사로 나갔다가 군기시 첨정,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43살에 진주목사가 되었다가 병부(兵符)를 도난당해 파직되었고, 강계부사,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니탕개(尼湯介)에게 패하여 그 책임으로 의주 인산진(麟山鎭)에 유배되어 죽었다. 시문과 글씨에 능했고, 홀로 절개를 지켜 당파에 들지 않아 외직으로 밀려났으나 치적이 뛰어나고 청렴결백하여 장수로 등용되었다. 변방에서..

-조선시대 2020.08.21

이이의 시

이이(李珥, 1536-1584)는 명종,선조 때의 학자요 문신이다. 과 , 등에 의하면,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이며 본관은 덕수(德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어머니 사임당 신씨에게 글을 배웠다. 16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9살에 금강산에 입산하여 불서를 연구하다가 이듬해 하산하여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유학에 전념하였으며 23살에 이황을 찾아가 만났다. 29살에 생원시와 문과에 장원하여 호조좌랑이 되고, 정언, 이조좌랑을 지냈다. 33살에 사헌부 지평이 되고, 성혼과 학문을 논했으며, 명나라에 다녀와서 부교리,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을 지었으며, 여러 시무를 논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사직하고 해주 처가로 낙향하여 후진을 가르쳤고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38살에 ..

-조선시대 2020.08.21

홍랑의 시

홍랑(洪娘)은 선조 때 함경남도 홍원(洪原) 출신의 기생이다. 이병기(李秉岐)의 에 의하면, 홍랑은 1573년(선조6) 가을에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이 북평사로 함경도 경성에 갔을 때 그를 따라가 막중(幕中)에 머물면서 정이 깊었는데, 이듬해 봄에 고죽이 서울로 돌아오게 되자 쌍성(雙城)까지 따라와 작별하고 돌아가다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러 날이 저물고 마침 비가 오자 시조 한 수를 지어 고죽에게 보냈다. 그 후 3년 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고죽이 병석에 누웠다는 말을 듣고 즉일로 떠나 경성에서 7주야를 달려 서울에 왔는데, 그 때 양계(함경도와 평안도)에 통행을 금지했고 명종 비 인순왕후가 승하하여 평일과 같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말썽이 되어 그가 벼슬을 내놓게 되고 홍랑은 고향..

-조선시대 2020.08.21

서익의 시

서익(徐益, 1542-1587)은 선조 때의 문신이다. 에 의하면, 자는 군수(君受)이고 호는 만죽헌(萬竹軒)이며 본관은 부여다. 젊어서 정철, 최경창 등과 교유했으며, 28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40살에 군수로 있다가 구휼을 잘못하여 파직 당하였다. 42살에 비변사 당상 이준민(李俊民)이 ‘문무(文武)의 재능이 있으며 기개가 뛰어났으나 호탕하여 행동을 가다듬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현직(顯職)에 등용되지 못하였다.’고 추천하여 다시 군수가 되었다. 다음해 종부시 첨정으로 관북 순무어사가 되었다. 44살에 영상 박순(朴淳)이 장재(將才)가 있다고 추천하여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되었으나 탄핵을 받은 이이(李珥)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정여립의 처신을 비판하고 동인을 비난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

-조선시대 2020.08.21

백광훈의 시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은 명종, 선조 때의 시인이다. 정호(鄭澔, 1648-1736)의 에 실린 그의 묘갈명(墓碣銘)에 의하면, 자는 창경(彰卿)이고 호는 옥봉(玉峯)이며 본관은 해미(海美)다. 영암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시재(詩才)가 있어 13살에 시명(詩名)이 알려졌고 이후백(李後白)의 문하에 있으면서 최경창(崔慶昌)과 함께 시단을 휩쓸었다. 형 백광홍과 함께 양응정(梁應鼎)에게 배웠고 진도에 귀양살이하는 노수신(盧守愼)을 찾아가 배우고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었다. 28살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산수를 즐기며 시서(詩書)에 전념했다. 36살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白衣)로 제술관이 되어 사신을 감탄케 했다. 41살에 선릉참봉이 되었고 다시 전주전(全州殿) 참..

-조선시대 2020.08.21

성혼의 시

성혼(成渾, 1535-1598)은 선조 때의 학자,문신이다. 과 에 의하면, 자는 호원(浩原)이고 호는 우계(牛溪)이며 본관은 창녕으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이다. 17살에 감시(監試) 초시에 합격했으나 신병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경학(經學)에 전념했으며 이이(李珥)와 교유했다. 선조 초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참봉, 현감, 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46살 이후 장령, 집의, 첨정 등을 거쳐 이조참의, 이조참판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우참찬에 오르고, 대사헌을 거쳐 우찬성,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60살에 상호군, 좌참찬을 역임하고 좌찬성에 올랐다.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고, 임란에 왕이 파천할 때 파주에서 맞지 않았다는..

-조선시대 2020.08.21

유자신의 시

유자신(柳自新, 1533-1612)은 광해군의 장인이다. 과 에 따르면, 그는 태릉 수릉관(守陵官) 동지중추부사 유잠(柳潛)의 아들인데 본관은 문화(文化)다. 진사가 된 후 33살에 아버지를 도와 태릉 참봉이 되었다. 형조참판을 거쳐 56살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지중추부사로 세자 광해군을 따라 강계로 갔으며, 63살에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있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듬해 한성우윤(漢城右尹)이 되어 일본과 통상을 반대하였고, 명나라 감군포정사(監軍布政使)의 부하를 구타하여 파면되었다. 다음해 한성 판윤(漢城判尹)이 되었으나 자기 집의 돌을 채취했다고 감동관(監董官)을 구타하여 체직되었다. 67살에 개성유수로 나갔고, 2년 후 지돈령부사가 되어 다시 일본..

-조선시대 202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