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248

월산대군의 시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은 이름이 정(婷)이고 성종의 형이다. 에 실린 그의 졸기에 따르면,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풍월정(風月亭)이며 덕종과 인수대비의 맏아들로 세조의 사랑을 받고 궁중에서 자랐다. 7살에 월산군(月山君)에 봉해지고 성종2년(1471)에 대군(大君)으로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성품이 담박하여 오직 시주(詩酒)만 좋아하였다. 시가 평담(平淡)하여 중국에까지 애송되었으며 음률(音律)도 알았다. 행실이 겸손하고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성종의 우애가 돈독하여 대우가 융숭하였다. 고양(高陽)의 북촌에 별장을 지어놓고 자연에 묻혀 일생을 마쳤다. 시조 1수가 전한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

-조선시대 2020.08.21

남이의 시

남이(南怡, 1441-1468)는 세조 때 무공을 세웠으나 예종 때에 모함으로 처형된 무신이다. 과 에 의하면,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의산군(宜山君) 휘(暉)와 태종의 4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아들이며, 권람(權擥)의 사위이다. 17살(세조3)에 무과에 장원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우대장(右大將)으로 이시애를 토벌하여 1등공신이 되고, 또 서북변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여 27살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예종은 그를 꺼려했다. 예종 즉위 후 대궐에서 숙직하다가 혜성(彗星)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이 깔릴 징조라고 말했는데, 평소에 그의 승진을 시기하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 반역을 꾀한다고 모함하여 처형되었다. 그의 시조 한 수를 보자. 장검(長劍..

-조선시대 2020.08.21

이현보의 시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연산,중종 때의 문신이며 시인이다. 과 등에 보면, 호는 농암(聾巖)이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의 문하에서 배웠다. 32살(연산군4)에 문과에 급제했고,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왕에게 가까이서 사초(史草)를 쓰게 해 달라고 청하여 왕이 미워했지만 허락했다. 성균관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어 서연관(書筵官)의 잘못을 말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이후에 호조좌랑, 사헌부 지평 등을 거쳤는데 사람들이 그를 겉은 검고 속은 청렬(淸烈)한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했다. 42살에 영천군수로 나가 부모를 위해 명농당(明農堂), 애일당(愛日堂)을 짓고 귀전(歸田)을 마음먹었다. 다시 사간원 사..

-조선시대 2020.08.21

이총의 시

이총(李摠, ?-1504)은 연산군 때의 문신이다. 와 에 의하면, 자는 백원(百源)이고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 또는 구로주인(鷗鷺主人)이며, 본관은 전주로 태종의 증손이다. 종친으로 무풍정(茂豊正)에 봉해졌으나, 김종직의 문인으로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고 거제도에 귀양 갔다.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甲子士禍)에 부자 7인이 모두 사형 당했다. 그는 생김새가 준수하고 시문이 능했으며 글씨에 뛰어났다. 또한 음률을 알아 거문고를 잘 탔으며 양화도에 별장을 지어놓고 몸소 배를 저으며 낚시를 즐기고 벗들과 시와 거문고로 청담을 일삼았다. 남효온(南孝溫), 김일손(金馹孫) 등과 김종직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므로 유자광(柳子光) 등 훈구파의 미움을 받았다. 나의 ..

-조선시대 2020.08.21

정희량의 시

정희량(鄭希良, 1469-?)은 연산군 시절의 문신이었지만 사화에 휩쓸려 행방불명이 된 인물이다. 와 , 등에 보면, 자는 순부(淳夫)이고, 호는 허암(虛庵)이며, 본관은 해주다. 23살(성종23)에 사마시에 장원하고 성종25년 겨울에 왕이 죽어 재를 올리자 극언으로 상소했다가 다음해에 해주로 유배되었다. 여름에 풀려나서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검열 등을 거쳐 28살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예문관 대교(待敎)가 되어 왕(연산군)에게 경연(經筵)에 충실할 것과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상소하여 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 해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었으므로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김해로 옮겼다. 이듬해에 풀려나 모친상으로 고양에서 시묘살이를 하다가 시절에..

-조선시대 2020.08.21

김식의 시

김식(金湜, 1482-1520)은 중종 때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과 에 보면, 자는 노천(老泉)이고 호는 사서(沙西)이며 본관은 청풍이다. 20살에 진사가 되었으나 과거공부에 힘쓰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조광조와 교유하였다. 34살에 천거되어 광흥창 주부, 이조좌랑, 장령 등을 역임하고, 기묘년(1519) 현량과에 장원하여 부제학을 거쳐 대사성이 되었다. 조광조, 김안국 등과 함께 도학파를 이루어 제도개혁과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다가 남곤, 심정 등의 훈구파가 일으킨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선산에 유배되었다. 그 후 조광조가 사사되고 형벌이 더해진다는 말을 듣고 거창으로 도망했다가 자살했다. 그는 경사(經史)를 두루 읽고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시조 3수가 전한다. 소선(小船)에 그물 실을 제 주준..

-조선시대 2020.08.21

조광조의 시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중종 때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과 등에 의하면, 자는 효직(孝直)이고 호는 정암(靜庵)이며 본관은 한양이다. 김굉필의 문인이며 성리학을 연구하여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29살에 진사가 되고 34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전적, 감찰 등의 벼슬을 지내고 임금의 신임을 얻어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했다. 수찬, 정언, 교리 등을 거치며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실시케 하고,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를 없애게 했다. 기묘년(1519)에 대사헌에 올라 현량과를 실시케 하여 신진사류를 요직에 안배하고 반정공신들의 삭훈(削勳)을 주장하여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에 홍경주, 남곤, 심정 등 훈구파가 후궁을 움직여 무고를 하고, 임금이 그의 도..

-조선시대 2020.08.21

성세창의 시

성세창(成世昌, 1481-1548)은 중종 때의 문신이다. 과 에 보면, 자는 번중(蕃仲)이고 호는 둔재(遯齋)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성현(成俔)의 아들이고,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21살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정묘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 전적, 헌납, 이조정랑, 직제학, 예조참의 등을 두루 거쳤다. 기묘년(1519)에 시국이 위태로움을 알고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42살에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형조참판, 대사성, 대사헌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다. 김안로(金安老)를 논척하다가 평해(平海)에 귀양 갔다. 57살에 우참찬이 되고, 여러 판서와 대제학, 좌찬성을 거쳐 65살에 좌의정이..

-조선시대 2020.08.21

박영의 시

박영(朴英, 1471-1540)은 성종,중종 때의 무신이다. 과 에 의하면, 자는 자실(子實)이고 호는 송당(松堂)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양녕대군의 외손으로 무예에 뛰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21살에 이극균(李克均)의 건주위 토벌에 종군하였고, 이듬해(성종23, 1492)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며, 연산군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갔다. 정붕(鄭鵬)과 교유하여 과 경전을 배웠다. 중종반정 후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조방장이 되어 이를 평정하였고, 황간현감, 강계부사, 의주목사를 거쳐 승지가 되었다. 기묘년(1519)에 병조참판이 되었으나 소인들이 조광조(趙光祖)를 미워하는 것을 보고 병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성절사로 북경에 갔으므로 기묘사화를 모면했다. ..

-조선시대 2020.08.21

서경덕의 시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중종 때의 성리학자다. 과 에 보면, 자는 가구(可久)이고 호는 화담(花潭)이며 본관은 당성(唐城)이다. 집이 가난하여 독학으로 학문을 깨우쳤으며 산림(山林)에서 후진을 가르쳤고 삼남(三南)을 유람했다. 학문은 사색하여 스스로 깨우치는 것을 위주로 삼았다. 조광조가 현량과에 천거했으나 과거보지 않았고, 속리산, 지리산 등 명승지를 둘러보고 시를 남겼다. 43살에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개성의 화담에 초막을 짓고 성리학에 전념하여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체계화하고 주기론(主氣論)을 내세웠다. 수학과 역학(易學)에도 정통했다. 박순(朴淳)과 허엽(許曄)이 그의 문인이고,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시대 202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