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조욱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10

조욱(趙昱, 1498-1557)은 중종, 명종 때의 학자다. <명종실록>과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를 보면, 그의 자는 경양(景陽)이고 호는 용문(龍門), 우암(愚菴) 등이며 본관은 평양이다. 19살(1516, 중종11)에 생진(生進) 양시(兩試)에 합격했으나 학문에 뜻을 두고 조광조(趙光祖)와 김식(金湜)에게 배웠다. 조광조가 “여러 제자 중에 도를 구하는 데 독실하기는 조욱만한 이가 없다.”고 했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었으나 나이 가장 어려 화를 면했다. 형 성(晟)과 함께 삭녕(朔寧)에 집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다가 선원전(璿源殿) 참봉에 추천되자 어머니 봉양을 위해 나아가 순릉과 영릉 참봉을 지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용문산에 은거하여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56살(1553, 명종8)에 내섬시(內贍寺) 주부에 제수되었고, 다시 장수현감이 되어 선치(善治)했다. 58살에 왜구가 침입하자 침착하게 막아낸 뒤에 병으로 사직하고 용문산으로 돌아왔다. 사람됨이 허심탄회하고 담박하였으며 산수 유람을 즐기고 시에 능했다. 의리지학(義理之學)에 밝았고 곤궁함에 뜻이 흔들리지 않았다. 성수침(成守琛), 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 김안국(金安國) 등 당대 명사들과 교유했다.

 

 유벽(幽僻)을 찾아가니 구름 속에 집이로다.

 산채(山菜)에 맛들이니 세미(世味)를 잊을로다.

 이 몸이 강산풍월(江山風月)과 함께 늙자 하노라.

 

그가 용문산에 은거하여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며 산천유람을 즐길 때에 지은 작품이다. 산림처사의 생활과 각오가 잘 나타나 있다. 기묘사화로 스승과 벗들이 억울하게 죽자 벼슬에 대한 뜻을 버렸지만 생활이 곤궁하여 늙은 모친의 권유로 과거를 보았고, 참봉에 추천되자 말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모친이 죽은 후에 곧 용문산에 들어가 은거했는데 그 때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초장에는 그윽하고 외진 곳에 자리 잡은 구름에 둘러싸인 집을 형상화했다. 그가 용문산에서 세상을 멀리하고 학문에 전념하는 정경을 한 폭의 산수화처럼 제시한 것이다. 중장은 그 곳에서 살아가는 소박한 생활 형편이다. 산나물에 맛들이고 사니 번화한 세상의 맛난 음식이나 재미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세상을 버리고 숨어들어 갔으니 세상의 좋은 맛은 마땅히 잊어버려야 할 것이다. 종장에서 자연 속에 노닐며 늙어가려는 각오를 말했다. 그는 그렇게 살다가 죽을 생각이었으나 명종이 성수침, 조식, 이희안, 성제원 등 덕행 있는 선비에게 벼슬을 내리자 산림처사의 길을 접고 벼슬길에 나왔다. 연마한 학문을 실천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장수현감이 되어 백성을 새롭게 하고 풍속을 착하게 바꾸며 번거로운 부담을 줄이고 자제를 교육하며 왜적을 막은 후에 다시 산림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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