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조광조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23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중종 때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중종실록>과 <연려실기술> 등에 의하면, 자는 효직(孝直)이고 호는 정암(靜庵)이며 본관은 한양이다. 김굉필의 문인이며 성리학을 연구하여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29살에 진사가 되고 34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전적, 감찰 등의 벼슬을 지내고 임금의 신임을 얻어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했다. 수찬, 정언, 교리 등을 거치며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실시케 하고,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를 없애게 했다. 기묘년(1519)에 대사헌에 올라 현량과를 실시케 하여 신진사류를 요직에 안배하고 반정공신들의 삭훈(削勳)을 주장하여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에 홍경주, 남곤, 심정 등 훈구파가 후궁을 움직여 무고를 하고, 임금이 그의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게 되어, 왕권을 바로잡는다며 훈구파가 기묘사화를 일으켜 그를 능주(綾州)로 유배시켰다가 죽였다. 그는 성품과 행실이 고결하고 학문이 순정(純正)하였으며 고도(古道)를 말하여 선비의 기풍을 바로잡으려 했다. 시조 2수가 전한다.

 

저 건너 일편석(一片石)이 엄자릉(嚴子陵)의 조대(釣臺)로다.

창태(蒼苔) 비낀 가에 흰 두 점이 무슨 것고.

지금에 선생유적(先生遺跡)이 백구(白鷗) 한 쌍 떴더라.

 

꿈에 증자(曾子)께 뵈와 사친도(事親道)를 묻자온데

증자왈(曾子曰) 오호(嗚呼)라 소자(小子)야 드러스라.

사친(事親)이 기유타재(豈有他哉)리오 경지이이(敬之而已) 하시니라.

 

첫 수는 강호의 자유로운 생활을 읊은 것이고, 둘째 수는 유교의 효도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첫 수의 초장은 강가의 바위를 엄자릉의 낚시터라고 하여 후한 광무제의 어린 날 함께 배운 친구였던 엄광(嚴光)이 벼슬을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묻혀 지낸 것처럼 자신도 강호에서 학문으로 일생을 보낼 뜻을 함축하게 했다. 중장에는 그 바위에 낀 푸른 이끼 가에 흰 점이 무엇이냐고 묻고 종장에서 그것이 엄자릉의 자취와 같은 흰 갈매기 한 쌍이라고 하여 강호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흰 갈매기에다 자신의 지향을 부쳤다고 할 것이다.    

둘째 수는 증자에게 부모를 모시는 길을 묻고 증자의 대답을 듣는 형식이다. 초장은 효자이면서 <효경>을 지은 증자를 꿈에 뵙고 부모를 섬기는 도를 묻는 것이고, 중장은 증자가 제자를 불러 강설을 시작하려는 서두이며, 종장은 효도의 본질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경하는 것일 따름이라는 말을 서술한 것이다. 효도는 깨어있는 정성으로 부모를 모시는 것일 뿐이라는 유교적 가르침을 시조의 형식을 빌려서 서술한 것으로 시적인 정감이나 세련성이 발현되지는 않았다. 이 두 수는 미흡하긴 하지만, 젊어서는 전원에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려 했던 그의 삶의 지향과, 그가 깨우친 효도의 도리를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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