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현보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28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연산,중종 때의 문신이며 시인이다. <농암선생집(聾巖先生集)>과 <국조인물고> 등에 보면, 호는 농암(聾巖)이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의 문하에서 배웠다. 32살(연산군4)에 문과에 급제했고,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왕에게 가까이서 사초(史草)를 쓰게 해 달라고 청하여 왕이 미워했지만 허락했다. 성균관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어 서연관(書筵官)의 잘못을 말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이후에 호조좌랑, 사헌부 지평 등을 거쳤는데 사람들이 그를 겉은 검고 속은 청렬(淸烈)한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했다. 42살에 영천군수로 나가 부모를 위해 명농당(明農堂), 애일당(愛日堂)을 짓고 귀전(歸田)을 마음먹었다. 다시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가 밀양, 안동부사, 충주, 성주목사를 지냈다. 59살에 부모가 늙었다고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으나, 다시 내직으로 소환되었다가 대구부사가 되고, 65살에 모친상을 치른 후에 형조참의, 경주부윤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71살에 부친상과 처상(妻喪)을 당하여 귀향했다가 형조참판, 호조참판이 되었고, 76살 지중추부사로 치사하여 진신(搢紳)의 전별을 받으며 돌아갔다. 강호에 노닐며 ‘효빈가’, ‘농암가’를 지었다. 다음해 지산정사(芝山精舍)를 짓고,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과 교유하였다. 83살에 ‘어부사’를 산정(刪定)했고, 85살에 ‘생일가’를 지었다. 그는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담박하고 욕심이 없어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당시에 지조가 완전하였던 사람 중 으뜸으로 쳤다.

 

 

귀거래(歸去來) 귀거래(歸去來)하되 말뿐이요 갈 이 없어

전원(田園)이 장무(將蕪)하니 아니 가고 어찌 할꼬.

초당(草堂)에 청풍명월(淸風明月)이 나명들명 기다리나니.

 

농암(聾岩)에 올라 보니 노안(老眼)이 유명(猶明)이로다.

인사(人事) 변한들 산천이딴 가실까.

암전(岩前)에 모수모구(某水某丘) 어제 본 듯하여라.

 

공명(功名)이 그지 있을까 수요(壽夭)도 천정(天定)이라.

금서(金犀) 띠 굽은 허리에 팔십봉춘(八十逢春) 긔 몇 해오.

연년에 오늘 날이 역군은(亦君恩)이샷다.

 

첫 수는 ‘효빈가(效嚬歌)’이고, 둘째 수는 ‘농암가(聾岩歌)’이며, 셋째 수는 ‘생일가(生日歌)’다. 그는 내외직의 여러 벼슬을 거쳤지만 42살 이후에는 귀전원의 결심을 굳혔고 부모봉양을 핑계하여 귀향하려 했으므로 지방관을 오래 맡았다. 중앙정계의 벼슬보다는 강호자연 속에서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76살에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도연명이 ‘귀거래사’를 지은 것을 흉내내어 ‘효빈가’를 짓고, ‘농암가’를 지었으며, 또 ‘생일가’를 지었다. 그리고 전부터 전해오던 ‘어부사’를 정리하고 재창작하여 ‘어부장단가’를 지었던 것이다.

첫 수는 벼슬을 그만두고 한강을 거슬러 고향으로 배를 타고 가면서 ‘귀거래사’의 ‘배는 요요히 가볍게 흔들리고 바람은 표표히 옷깃을 스친다.’는 구절을 읊조렸는데 그 흥을 본떠서 이 노래를 지었다. 초장은 벼슬하는 사람들이 말로는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정작 실천하는 이가 없다는 탄식이다. 모두들 명리(名利)를 추구하는 데 열심이지만, 자신은 귀전원으로 명철보신(明哲保身)을 하겠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중장은 ‘귀거래사’의 첫 구절(歸去來兮 田園將蕪 胡不歸)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다. 그만큼 도연명의 심정과 흥취에 동조한다는 말이다. 종장은 자신이 돌아가야 할 전원생활의 풍경이다. 거기에는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벗으로 하는 초당에서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둘째 수는 전원에 돌아와서 옛날의 놀던 자취가 변함없음을 기뻐하고, 자연의 항구성을 새로이 발견하는 깨우침을 읊었다. 초장은 역설적 기법이다. ‘귀머거리 바위에 오르니 늙은 눈이 오히려 밝아진다.’라는 말은 귀먹은 바위에 눈 어두운 늙은이가 올랐으면 듣는 것 보는 것이 흐릿할 것이 당연한 표면적 이치다. 그러나 옛적에 놀던 귀머거리 바위에 올라보니 늙은 눈에 옛날의 풍경이 역력히 되살아날 것이니 오히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이 내면적 진실이다. 중장에는 인간사와 산천을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으로 대조시켰다. 사람의 일, 특히 조정의 벼슬살이야 변화난측하고 험난한 것이지만 고향산천은 변함없이 편안한 곳이다. 종장에서 어린 날 자신이 놀던 물과 언덕의 이름들을 짚어보면서 자연의 항구성을 새삼 깨우치는 것이다.

셋째 수는 앞의 두 수를 지은 지 9년 뒤 85살 되던 생일날에 자손과 이웃이 잔치를 차려 헌수할 때 지은 노래다. 초장은 공명에 대한 욕심이 끝이 없겠지마는 사람의 목숨은 하늘이 정한 것이니 지나친 욕심은 자제해야 한다는 말이다. 중장에서 자신은 85살에 2품 이상에게 임금이 내린 금서띠를 두르고 생일을 맞이하여 자손의 헌수를 받고 있으니 공명과 천수를 함께 누린다고 했다. 종장에서 해마다 맞는 이 생일날의 잔치가 모두 임금의 은혜라고 하여 관용구를 빌어 자족한 마음을 토로하였다. 이렇게 그는 전원에 돌아와 자족한 만년을 보내는 심정을 세 수의 시조에 담았던 것이다. 다음은 어부단가(漁父短歌) 다섯 수를 보자. 

 

이 중에 시름 없으니 어부(漁父)의 생애이로다.

일엽편주(一葉扁舟)를 만경파(萬頃波)에 띄워 두고

인세(人世)를 다 잊었거니 날 가는 줄을 안가.

 

굽어는 천심록수(千尋綠水) 돌아보니 만첩청산(萬疊靑山)

십장홍진(十丈紅塵)이 얼마나 가렸는고.

강호(江湖)에 월백(月白)하거든 더욱 무심하여라.

 

청하(靑荷)에 밥을 싸고 녹류(綠柳)에 고기 꿰어

노적화총(蘆荻花叢)에 배 매어 두고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를 어느 분이 알으실꼬.

 

산두(山頭)에 한운(閑雲)이 기(起)하고 수중(水中)에 백구비(白鷗飛)라.

무심코 다정하니 이 두 것이로다.

일생에 시름을 잊고 너를 좇아 놀으리라.

 

장안(長安)을 돌아보니 북궐(北闕)이 천리(千里)로다.

어주(漁舟)에 누웠은들 잊은 슻이 있으랴.

두어라 내 시름 아니라 제세현(濟世賢)이 없으랴.

 

 <농암선생문집>에 의하면, 그가 83살에 전해 오던 ‘어부가’를 정리하여 장가(長歌) 아홉과 단가(短歌) 5수를 만들어서 반가운 손님과 좋은 경치를 만나면 아이들을 시켜 읊조리고 노래 부르게 하여 함께 즐겼는데, 거기에는 공명을 버리고 표표히 자연에 노니는 뜻을 담았다고 하였다. 단가 5수가 그의 완전한 창작은 아닐지라도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된 것이므로 여기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첫 수에는 강호에서 자연을 즐기며 근심 없이 사는 사람을 어부라고 하였다. 물론 이것은 선비가 관념적으로 어부의 생활을 파악한 것으로 세속에 매이지 않고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사람의 생활을 상징한 것이다. 그리하여 어부는 만경창파에 배를 띄우고 세상사를 잊고 살아간다고 하였다. 이것은 또한 시인이 지향하였던 전원생활의 투영이기도 하다. 둘째 수에는 굽어보니 깊고 푸른 물이요 돌아보니 겹겹이 겹친 푸른 산이니 속세의 붉은 먼지가 여기에는 가려졌을 것이고, 강호에 달이 떠오른다면 더욱 세상사에 무심한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세속의 홍진을 의식하고는 있지만 자연을 즐기는 모습이다.

셋째 수에는 연잎에 밥을 싸고 버들가지에 고기 꿰어서 갈대 사이에 배 매어두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어부의 생활에서 자연에 동화한 삶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소옹(邵雍)의 ‘청야음(淸夜吟)’에서 ‘달이 하늘 가운데 오고, / 바람이 물위에 불어올 때, / 이러한 맑은 뜻을 / 아는 이가 적을 것이라’ (月到天心處 風來水面時 一般淸意味 料得少人知)고 읊은 경지와 유사하다고 한 것이다. 자연 속에 동화되어 자연의 이법대로 사는 뜻을 음미한다는 점에서 상통한다고 하겠다.  넷째 수에는 산기슭에 한가한 구름이 피어나고 물위엔 흰 갈매기 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자연 속에서 이것들이 다정하게 살듯이 자신도 자연에 동화되어 살겠다고 하였다.

다섯째 수에는 임금이 계신 곳을 돌아보니 천리나 떨어졌지만, 강호에서 어부처럼 살아간다고 해서 임금을 잊은 적은 없다. 그러나 임금을 도와 세상을 건질 인재는 따로 있을 것이니 나는 세상 시름을 접고 자연에 노닐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어부단가’ 5수에는 자연 속에서 세속의 공명을 잊고 표표히 살아가는 강호의 즐거움을 읊은 것이라고 하겠다.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산대군의 시  (0) 2020.08.21
남이의 시  (0) 2020.08.21
이총의 시  (0) 2020.08.21
정희량의 시  (0) 2020.08.21
김식의 시  (0) 202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