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박영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22

박영(朴英, 1471-1540)은 성종,중종 때의 무신이다. <연려실기술>과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자는 자실(子實)이고 호는 송당(松堂)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양녕대군의 외손으로 무예에 뛰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21살에 이극균(李克均)의 건주위 토벌에 종군하였고, 이듬해(성종23, 1492)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며, 연산군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갔다. 정붕(鄭鵬)과 교유하여 <대학(大學)>과 경전을 배웠다. 중종반정 후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조방장이 되어 이를 평정하였고, 황간현감, 강계부사, 의주목사를 거쳐 승지가 되었다. 기묘년(1519)에 병조참판이 되었으나 소인들이 조광조(趙光祖)를 미워하는 것을 보고 병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성절사로 북경에 갔으므로 기묘사화를 모면했다. 김해부사로 강등되었다가 무고로 친국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16년간 두문불출하며 학문에 전념하다가 정유년(1537)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주역>과 천문지리에 연구가 깊었으며, 특히 의술에 능하였다.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첨피기오(瞻彼淇澳)한대 녹죽(綠竹)이 의의(猗猗)로다.

유비군자(有斐君子)여 낚대를 빌리렴은

우리도 지선명덕(至善明德)을 낚아볼까 하노라.

 

이 시조는 강호에서 학문에 전심하는 심경을 읊은 작품인데, 그가 고향에 물러나 있을 때 지었을 것이다. 초장과 중장은 <시경(詩經)> 위풍(衛風)의 “저 기수(淇水)의 물굽이를 보아라. / 푸른 대나무 무성하여 아름답구나. / 어여쁜 우리 님은 / 뼈를 다듬은 듯 / 구슬을 다듬은 듯 (瞻彼淇奧 綠竹猗猗 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이라는 구절을 차용한 것이다. <시경> 위풍의 시는 경치를 묘사하고 군자를 찬미하는 구절을 나란히 놓아 이른바 비(比)의 수법으로 군자를 대나무에 비유하였는데, 시조에서도 그러한 수법과 의미를 살렸다. 다만 중장에서 군자를 강호에서 자연을 즐기고 학문에 전념하는 선비로 바꾸었고, 그에게 낚싯대를 빌려서 무언가를 낚으라고 하였다. 종장에서는 군자를 우리라고 인칭을 전환하고, 자신이 낚아 올려야 할 것이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지선(至善)과 명덕(明德)이라고 하여 전원에서 학문하는 궁극적 목적이 ‘지극히 착한 것’에 머물고,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무신이었으면서도 학문에 전념하는 심경을 표현했다. 사화가 자주 일어났던 불안한 정국을 피해서 전원에 은거했던 그가 강호에서 학문하는 의미와 즐거움을 토로한 것으로, 이것은 사림파의 선비들이 처했던 입지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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