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세창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22

성세창(成世昌, 1481-1548)은 중종 때의 문신이다. <연려실기술>과 <국조인물고>에 보면, 자는 번중(蕃仲)이고 호는 둔재(遯齋)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성현(成俔)의 아들이고,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21살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정묘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 전적, 헌납, 이조정랑, 직제학, 예조참의 등을 두루 거쳤다. 기묘년(1519)에 시국이 위태로움을 알고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42살에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형조참판, 대사성, 대사헌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다. 김안로(金安老)를 논척하다가 평해(平海)에 귀양 갔다. 57살에 우참찬이 되고, 여러 판서와 대제학, 좌찬성을 거쳐 65살에 좌의정이 되었다. 이 해 을사사화로 장연(長淵)에 유배되어 거기서 죽었다. 문장과 시서화, 음률에 뛰어났다.

 

낙양(洛陽) 얕은 물에 연 캐는 아이들아.

잔 연 캐다가 굵은 연잎 다칠세라.

연잎에 깃들인 원앙이 선잠 깨어 놀라니라.

 

이 시조는 연 캐는 아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연을 캐라는 당부의 말인데 이러한 당부를 하려고 시를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의 생명은 유추이고, 그가 일생을 관료로 살아온 만큼, 여기서 말하는 연 캐는 행위는 정치현실에 유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아마도 당시의 훈구파와 신진사류, 또는 사장파와 도학파의 대립으로 불안해 지던 정국에 대한 경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다. 초장에서 배경을 ‘낙양의 얕은 물’이라고 한 것은 그가 두 번 중국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긴 하지만 아마도 국내의 일로 유추하지 말라는 장치인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와 함께 귀양간 적이 있었고, 기묘사화가 일어날 기미를 알고 병을 핑계로 파주 별장으로 피하였으며, 김굉필의 문인임에도 불구하고 조광조와 뜻을 같이하는 김정(金淨)의 권유를 물리치고 관계를 끊을 만큼 처신이 매우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중장에서 ‘잔 연 캐다가 굵은 연잎 다칠까 두렵다’는 말은 반정공신들인 훈구파를 몰아내고 도덕정치를 하자고 하는 사림파의 주장을 그는 이렇게 보았을 것이다. 신진사류의 주장이 잘못하다가는 정국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도학파와는 입장을 달리하는 사장파의 일원이기도 했으므로 도학파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종장에서 ‘굵은 연잎에 깃들인 원앙’은 임금이나 왕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정국이 위태로워지면 왕권의 약화를 가져올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조광조가 주도한 도덕정치의 주장은 중종이 감당할 수 없는 이상론이었고, 그래서 훈구파를 내세워 신진사류를 제거한 것이 기묘사화인 만큼 사림파의 주장은 왕권에 대한 위협이었다. 이러한 정치 상황을 연 캐는 아이에게 주는 당부의 말로 넌지시 암시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시조는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직전의 정치현실에 대한 암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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