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정희량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25

정희량(鄭希良, 1469-?)은 연산군 시절의 문신이었지만 사화에 휩쓸려 행방불명이 된 인물이다. <연산군일기>와 <연려실기술>, <허암유고(虛庵遺稿)> 등에 보면, 자는 순부(淳夫)이고, 호는 허암(虛庵)이며, 본관은 해주다. 23살(성종23)에 사마시에 장원하고 성종25년 겨울에 왕이 죽어 재를 올리자 극언으로 상소했다가 다음해에 해주로 유배되었다. 여름에 풀려나서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검열 등을 거쳐 28살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예문관 대교(待敎)가 되어 왕(연산군)에게 경연(經筵)에 충실할 것과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상소하여 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 해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었으므로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김해로 옮겼다. 이듬해에 풀려나 모친상으로 고양에서 시묘살이를 하다가 시절에 절망하고 분해 하다가[傷時憂憤] 신발을 강가에 남긴 채 사라졌는데, 사람들은 신선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총명하고 자부심이 강했으며 성질이 과격했다. 복서(卜書)를 좋아하여 ‘갑자년의 화는 무오년보다 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흐린 물 옅다 하고 남의 먼저 들지 말며

지는 해 높다 하고 번외(藩外)에 길 예지 마소.

어즈버 날 다짐 말고 네나 조심하여라.

 

이 시조는 험한 세상을 조심하며 살아가라는 당부에 대하여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거부하는 것을 대화체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의 성품이나 행적으로 보아 초중장의 화자는 세상 사람들이고, 그들의 말을 핀잔하고 거부하는 종장의 화자는 작자자신이다. 초장에서 물이 흐려서 깊이를 알 수 없는데 얕은 줄 알고 남 먼저 뛰어들지 말라고 하여 조심스레 세상을 살 것을 충고한다. 그는 궁에서 불교식 재를 올렸다고 성균관 유생을 대표해서 상소했고 왕에게 경연에 충실하고 간언을 수용하라고 상소했던 사람이다. 연산군에게 겁 없이 덤벼들었던 것이다. 물론 흐린 물은 당시의 혼탁한 세상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중장에는 기울어져 가는 해가 아직 높이 떠 있다고 집 울타리를 나서서 먼 길 가지 말라고 당부한다. 혼군 연산군이 다스리는 세상이니 해가 기울어지는 때라고 한 것이고 그런 때일수록 안전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폭군에게 이상적 군주의 길을 직언했으니 먼 길 나선 것이라 할 만하다. 종장은 이러한 충고에 대하여 시인 자신이 내뱉는 완강한 거부요 핀잔의 말이다. ‘어즈버’라는 긴 탄식을 한 다음에 두 번씩 나를 다짐하지 말고 네나 조심하며 잘 살라는 냉소적 외면으로 말을 막아버린 것이다. 과격한 저항인의 행동을 보는 듯하다.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현보의 시  (0) 2020.08.21
이총의 시  (0) 2020.08.21
김식의 시  (0) 2020.08.21
조광조의 시  (0) 2020.08.21
성세창의 시  (0) 202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