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총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26

이총(李摠, ?-1504)은 연산군 때의 문신이다. <연산군일기>와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자는 백원(百源)이고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 또는 구로주인(鷗鷺主人)이며, 본관은 전주로 태종의 증손이다. 종친으로 무풍정(茂豊正)에 봉해졌으나, 김종직의 문인으로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고 거제도에 귀양 갔다.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甲子士禍)에 부자 7인이 모두 사형 당했다. 그는 생김새가 준수하고 시문이 능했으며 글씨에 뛰어났다. 또한 음률을 알아 거문고를 잘 탔으며 양화도에 별장을 지어놓고 몸소 배를 저으며 낚시를 즐기고 벗들과 시와 거문고로 청담을 일삼았다. 남효온(南孝溫), 김일손(金馹孫) 등과 김종직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므로 유자광(柳子光) 등 훈구파의 미움을 받았다. 

 

나의 님 향한 뜻이 죽은 후면 어떠할지

상전(桑田)이 변하여 벽해(碧海)는 되려니와

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몸이 쓸 데 없어 세상이 버리오매

서호(西湖) 옛집을 다시 쓸고 누웠으니

일신(一身)이 한가할지나 님 못 뵈와 하노라.

 

겉으로 보기엔 충신이 임금을 사모하는 절의(節義)의 노래다. 그러나 작가의 삶과 연관시켜 보면 난정을 일삼다가 자신을 유배 보낸 임금을 일편단심으로 그리워했을 것인지 의심스럽다. 현실적으로 임금이 무도한 짓을 저질러도 오직 신하의 도리라는 명분을 지켜 관념상의 임금을 위해 충성을 말한 것이 선비들의 몸가짐이었으므로, 여기서도 그런 명분상의 연주(戀主)이거나 이상적으로 설정된 관념상의 임금에 대한 충성이라고 볼 밖에 없다. 

첫 수의 초장에는 자신의 죽음을 가정하고 사후에도 자신의 충성심이 어떨 것인지 스스로 질문하고 있다. 중장과 종장에서 세상은 변해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충성심은 변하지 않을 것임을 드러내었다. 연산군에게 고문을 당하고 이리저리 귀양을 다니다가 6년 후에 부자 7인이 몰살을 당하는 처지에서 연산군에 대한 충성을 이렇게 노래했을지 의심스럽다. 둘째 수는 자신의 재능이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강호에서 한가하게 지내지만 임금을 사모한다는 내용이다. 초장은 자신의 신분이 종친이었으므로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하였는데, 훈구파가 정국을 장악하고 신진사류를 몰아내려는 당시의 정국을 암시하려는 뜻도 있다. 중장은 조정에서 쓰이지 못하니 결국 자신의 별장이 있는 양화도에 물러나 친구들을 불러 시와 음악을 즐기고 낚시와 술로 소일하며 고담준론(高談峻論)하는 강호의 생활을 읊은 것이다. 종장에서 그런 생활 속에서도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말로 겉으로 충성을 드러내는 한편, 속으로 이상적인 임금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시인은 삶과 동떨어진 잠꼬대를 했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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