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김종서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37

김종서(金宗瑞, 1390-1453)는 세종 때 6진을 개척하였고 어린 단종을 보필하다가 죽은 문신이다. <세종 문종 단종실록>과 <해동명신록> 등에 의하면,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본관은 순천이다. 16살(태종5)에 문과에 급제하여 서른 살에 사간원 우정언을 지내고 44살에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6진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지내고 형조와 예조의 판서를 거쳐 57살에 우참찬이 되었다. <고려사>를 개찬하였고, 61살에 좌찬성이 되어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했다. 이듬해(문종1) 우의정에 올라 <세종실록>,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감수하였고, 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이 되어 황보인 등과 어린 왕을 보필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에 의해 아들과 함께 격살되었다.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신으로 문종의 유명(遺命)으로 단종을 보필한 재상 중 대호(大虎)라고 불리었다. 시조 2수가 전한다.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장백산(長白山)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떻다 능연각상(凌烟閣上)에 뉘 얼굴을 그릴꼬.

 

두 수 모두 육진을 개척할 때의 무인(武人)다운 호방한 기상을 펼친 작품이다. 그는 문신이었지만 문무를 겸전한 인물이었으므로 세종의 명을 받들어 변방을 개척하고 국경을 확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첫 수의 초장에는 변방의 황량한 풍경이 소개된다. 잎 진 나뭇가지에 불어 닥치는 바람과 차가운 눈을 비추는 달빛은 싸늘하고 거친 변방의 풍경이지만 그 속에서 강인한 무사의 기상을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중장에는 멀고 아득한 변방에서 국토를 지키는 사나이의 힘과 기상을 일장검(一長劍)으로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종장에서 긴 휘파람 큰 고함 소리를 지르면서 거칠 것 없는 기개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변방의 정서나 기상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당나라 시인들의 변새시(邊塞詩)와 비슷하지만 여기서는 넘치는 기개가 특징적이라 하겠다. 물론 이는 김종서의 담대하고 용맹스런 풍모에서 나온 것이다.

두 번째 수의 초장은 조선의 국경을 백두산과 두만강으로 정했던 그 때의 국경개척의 활약상을 말한 것이고, 중장에서 이러한 공적은 남의 글귀나 찾아서 따다 적는 썩은 선비들이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장쾌한 사나이들의 일이 아니겠느냐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종장에서 당나라 태종이 스물 네 명의 공신의 얼굴을 그려 붙인 능연각(凌烟閣)에다가 누구의 얼굴을 그려 붙여야 마땅하겠느냐고 하여 변방을 개척한 자신의 공적이 조정에서 공론을 일삼는 썩은 선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자부하였다. 사실 김종서와 최윤덕의 활약으로 국경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장한 것은 조선 초기의 큰 업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문신이면서 변방개척의 공로를 이뤘으니 이런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이 시는 변방 개척의 공로를 자부하는 씩씩한 기개를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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