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종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31

성종(成宗, 1457-1494)은 조선의 제9대 왕으로 이름은 혈(娎)이고 덕종의 둘째 아들이다. <성종실록>과 행장에 의하면, 5살에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지고 14살에 잘산군(乽山君)에 개봉(改封)되어 이듬해 즉위하였다. 이후 7년간 세조비 정희대비가 수렴청정하다가 1476년부터 친정했다. 즉위한 해에 귀성군 준(浚)을 유배했고, 숙의 윤씨를 왕비로 삼았다가 폐위하여 사사했다. 재위 기간 중에 문운(文運)이 크게 일어나 문화가 개화했고 문물제도가 정비되었다. <경국대전>을 완성하였고, <여지승람>, <동국통감>, <동문선>, <오례의>, <악학궤범> 등 많은 서적을 간행했다. 변방을 안정시켰고, 홍문관 확충과 독서당 신설, 양현고 설치 등으로 젊은 학자를 우대하고 교육과 문화의 진흥에 힘썼다. 인재등용에도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를 과감히 발탁하여 신진세력을 형성시켰다. 왕 스스로 경사와 백가에 두루 통했으며 성리학에도 정통했다. 서화와 활쏘기에도 능했다. 시조 1수가 전한다.

 

있으렴 부디 갈따 아니 가든 못할소냐.

무단히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려도 하 애도래라 가는 뜻을 일러라.

 

이 시조는 성종 25년 1월에 70세가 된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가려는 장령 유호인(兪好仁)을 합천군수로 삼아 전송하면서 왕이 지은 작품이다. 신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왕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악부(樂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유호인의 귀성을 허락했다. 유호인은 자가 극기(克己)이고 호는 뇌계(雷溪)이며 고령인(高靈人)이다. 갑오년에 문과에 올랐고, 김종직의 문인이다. 공의 집이 선산에 있었는데 노모를 모시고자 돌아가려 했다. 임금이 친히 전별하며 술에 취하여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위의 시조)  공이 감읍하였고 좌우에서도 감격하였다. 임금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그 가는 데를 밟아보게 하고, 이르기를 ‘나는 그를 생각하여 잊지 못하는데 그도 나를 생각할까’라고 했다. 명을 받은 자가 역정(驛亭)에 들었는데, 공이 누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오래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벽 위에 율시 한 수를 지어 ‘북쪽으로 멀어지는 임금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가까워지는 어머니를 보러 가네.’라 했다. 돌아와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조용히 영탄하기를 ‘호인은 비록 밖에 있지만 마음은 나를 잊지 않았구나.’라고 했다.

이 시조는 신하에게 건네는 구어체의 어투를 취하고 있다. 초장에서 세 번씩이나 신하의 사퇴를 만류하는데, ‘있으렴, 그래도 가겠느냐, 아니 가지는 못하겠느냐’고 다짐하듯 반복해서 묻는다. 이는 신하에 대한 간곡한 마음이요, 깊은 사랑의 표현이다. 중장에는 가려는 연유를 물어서 까닭 없이 싫어졌는지, 남의 말을 듣고 그러는지를 따져 캐묻고 있다. 그만큼 그가 자신을 버리고 가는 것이 서운하고 아쉽기 때문이다. 종장에는 어머니 봉양 때문에 고향으로 간다고 하지만 어진 신하가 임금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애달프니 귀향의 진정한 뜻을 말하라고 다그치고 있다. 곧 어머니 봉양 때문이지 임금이 싫어서 가는 것이 아님을 밝히라는 것이다. 신하가 임금을 버리는 것은 나라가 바르게 다스려지지 않을 때이다. 그러니 임금은 유호인처럼 문장과 행실이 뛰어난 신하가 자기 곁에 머물러서 치세를 도와달라는 것이다. 성종은 훈구파의 전횡을 견제하고자 사림파를 등용했고 유호인 같은 인재를 많이 잡아두고 싶었던 것이다. 유호인은 합천군수로 있다가 아깝게도 같은 해 4월에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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