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소춘풍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32

소춘풍(笑春風, 1470-1494)은 영흥(永興)의 명기였다.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와 고대본 <악부(樂府)>의 기록에 의하면, 성종은 여러 신하에게 주연을 열 때 매번 여악(女樂)을 베풀었다. 하루는 대궐에 불려 들어온 영흥 기생 소춘풍에게 술을 따르며 새 노래를 지어 문사를 칭찬하라고 명했는데, 금잔에 술을 따라 임금에게 감히 드리지는 못하고 영상 앞으로 나아가 잔을 들고 첫 노래를 불렀다. 그 뜻은 ‘순(舜)도 계시건마는 요(堯)아 내 님인가 하노라.’였다. 그 때 여러 무반이 노하니 임금이 또 노래를 지어 그들의 마음을 풀라고 했다. 소춘풍이 술을 따라 올리며 이르기를 ‘앞 말은 잘못 되었고 씩씩한 무부를 어찌 좇지 않으리오.’라고 했다. 이번에는 문반이 자못 기뻐하지 않았다. 임금이 또 노래로 양쪽을 화해시키라 하니 곧 셋째 노래를 불러서 문무가 모두 즐거워하였다. 이에 임금이 크게 기뻐하고 상으로 비단과 호피 후추 등을 많이 내렸다. 이로 말미암아 온 나라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 때 지었던 시조 3수를 살펴보자.

   

당우(唐虞)를 어제 본 듯 한당송(漢唐宋) 오늘 본 듯

통고금(通古今) 달사리(達事理)하는 명철사(明哲士)를 어떻다고

저 설 데 역력(歷歷)히 모르는 무부(武夫)를 어이 좇으리.

 

전언(前言)은 희지이(戱之耳)라 내 말씀 허물 마오.

문무일체(文武一體)인 줄 나도 잠간 아옵거니

두어라 규규무부(赳赳武夫)를 아니 좇고 어이리.

 

제(齊)도 대국(大國)이요 초(楚)도 역대국(亦大國)이라.

조그만 등국(滕國)이 간어제초(間於齊楚)하였으니

두어라 하사비군(何事非君)가 사제사초(事齊事楚)하리라.

 

조정의 잔치 자리에서 부른 노래라서 그런지 한문투에 토를 달아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는 어렵다. 앞에서 보았듯이 문신과 무신에게 술을 권하며 아양 떠는 노래다. 첫 수의 초장은 중국에서 태평성대라고 칭하는 요순시절이나 문물이 융성했던 한당송(漢唐宋)을 당대에 비긴 것이고, 중장에서 문관이 공부를 많이 해서 고금을 꿰뚫어 알고 온갖 일의 이치에 통달하였다고 추켜세운 다음, 종장에서 ‘제 설 데도 잘 모르는 무부들’을 어찌 좇겠느냐고 사정없이 깎아내렸다. 둘째 수의 초장은 앞 말이 장난이라고 부정해 버리고 그것을 허물치 말라는 무지조 몰염치의 기생다운 발언이다. 중장에서 무반도 문반과 한가지로 조정에서 중요하다고 무반의 기분을 무마한 다음에, 종장에서 씩씩한 무반을 따르겠다고 하여 이리저리 쏠리는 무절조를 드러내었다. 양쪽에 한번씩 아양을 떨었지만 결국 양쪽을 한번씩 성나게 한 셈이다. 그래서 셋째 수의 초장에서는 양쪽 모두 무시할 수 없는 상대임을 실토했다. 문신과 무신이 마치 중국의 전국시대에 힘을 겨루던 제나라와 초나라처럼 강대국이라고 비유했다. 중장에서 자신은 이 강대국 사이에 끼인 등나라처럼 힘이 없어 난처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종장에서 그러니 어느 나라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느냐며 제나라도 섬기고 초나라도 섬기겠다고 절개 없는 본색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기생이었고 그에게 절개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보다는 임금과 문무고관을 모신 자리에서 한문에 대한 교양과 능란한 재주로 모두를 즐겁게 하는 언어기교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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