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조준의 시

김영도 2020. 8. 25. 10:47

조준(趙浚, 1346-1405)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창업하고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태종실록>에 실린 조준의 졸기를 보면, 호는 우재(吁齋) 또는 송당(松堂)이고 평양 사람이다. 가계(家系)가 훌륭했고, 29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도 안렴사(江陵道按廉使)로 선정을 베푼 뒤 여러 번 옮겨 전법 판서(典法判書)에 이르렀다. 37살에 병마 도통사 최영의 휘하에서 체찰사로 왜구를 토벌했고, 이듬해 밀직제학에 임명되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사헌부 대사헌에 발탁되었다. 이성계, 정도전과 함께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개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47살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 개국 1등 공신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지고 문하좌시중과 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를 겸하였다. 이방원을 세자로 삼으려다가 묵살되자 사직했다가 왕자의 난이 끝난 후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지었으며 시문에도 뛰어났다. 60살에 죽었는데, 그의 풍도와 기개를 높이 쳤다. 국량(局量)이 넓고 사람을 차별 없이 정성으로 대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을 독점하고 권세를 오래 잡고 있었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그는 이성계와 이방원을 도와 조선을 창업하고 왕조의 기틀을 닦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라고 하겠다. 그가 남긴 시조 2수가 전하는데 두 작품의 의취가 비슷하다.

 

 

석양에 취흥(醉興)을 겨워 나귀 등에 실렸으니

십리계산(十里溪山)이 몽리(夢裡)에 지내었다.

어디서 수성어적(數聲漁笛)이 잠든 나를 깨와다.

 

술을 취(醉)케 먹고 오다가 공산(空山)에 자니

뉘 나를 깨우리 천지(天地) 즉금침(卽衾枕)이로다.

광풍(狂風)이 세우(細雨)를 몰아다가 잠든 나를 깨와라.

 

두 작품 모두 술에 취하여 자연 속에 동화되었다가 깨어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이성계 일파로 몰려 귀양을 간 적이 있고, 이방원을 세자로 삼으려다가 묵살되자 벼슬을 내 놓은 적이 있는데 이런 좌절의 시기에 이 작품들을 쓰지 않았나 생각된다. 두 수의 초장은 술에 취하여 나귀를 타거나 빈산에서 잔다고 하여 똑같이 취흥이 도도하게 올랐음을 말했다. 두 수의 중장은 십리에 걸친 산골짜기와 온 천지를 베개와 이불로 삼아서 꿈을 꾸었다고 했다. 자연 속에 동화되어 꿈꾸듯이 현실을 떠났다는 것이다. 요컨대 술과 자연에 취하여 현실을 잊어버렸다는 말인데 현직에 있으면서도 이런 경지에 들 수야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가 치밀하게 계획하고 세차게 밀어붙였던 일들에서 손을 떼게 되었을 때의 심경이나 생활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야 하겠다. 종장은 이렇게 현실을 도피하거나 현실에서 손을 떼고 있는 나를 깨우는 각성제로 어부의 피리소리와 미친바람에 불린 빗줄기가 등장했다. 이렇게 현실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할 것이 아니라 ‘잠든 나를 깨워서’ 현실에 눈을 돌리라고 한 것이다. 물론 이것을 술 먹고 자연 속에 누워 피리소리를 듣거나 비를 맞고 잠에서 깨어나는 자연과 동화된 생활을 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면 그의 삶에 연결하여 이 시조의 의미가 절실하게 살아나지 않는다. 술에 취해 자연 속에 자다가 미친 빗줄기에 잠을 깨어 자신의 갈 길을 자각한다고 해야 그가 살았던 궤적과 어울린다. 그러므로 강호자연에 심취했다기보다는 현실참여의 중대성을 각성했다는 것이 이 작품의 본뜻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직은 강호의 흥취에 젖어 노래할 때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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