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정도전의 시

김영도 2020. 8. 25. 10:46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을 일으킨 조선창업의 일등공신이다. <고려사>와 <태조실록>을 보면, 호는 삼봉(三峯)이고, 21살에 과거에 합격하여 낮은 벼슬을 지내다가 연이어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를 살았다. 29살에 성균박사가 되어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과 함께 성리학을 강론했다. 친명론을 주장하다가 권신 이인임의 미움을 받아 나주로 유배되었고, 귀양에서 풀려난 후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다. 42살에 동북면 도지휘사였던 이성계를 찾아가 혁명을 모의했다. 그 후 정몽주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정권을 잡자 밀직부사로 임명되어 조준, 윤소종과 함께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혁명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성계, 조준, 정몽주 등과 의논하여 공양왕을 세웠고, 정당문학과 우군총제사가 되었다. 이색과 우현보를 탄핵했으나 도리어 봉화, 나주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유배에서 풀려나 남은, 조준 등과 더불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 조선을 개창하였다. 도평의사사를 주관하고, 이숭인 우현보 등 반대파를 죽였으며, 좌명공신 봉화군(奉化君)에 봉해졌다. 방석(芳碩)을 세자로 정하게 했으며, 문하시랑찬성사로 개국 일등공신이 되었다. 조선 개국을 찬양하는 악장을 지었으며, 삼도도총제사가 되어 진법(陣法)을 군사들에게 훈련시켰다.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을 지었으며,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였다. 요동 공격을 목적으로 군사를 훈련하고 왕에게 출병을 요구했으나 조준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57살에 이방원에게 참수 당하였다. 그는 조선을 창업하고 유교의 이념에 따라 문물제도를 갖추는 데 중심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세자 책봉 문제로 말미암아 이방원과 갈등을 빚고 희생되었다. 그는 신유학에 정통하였으나 신분적 결함으로 진출에 지장이 있자 역성혁명을 통하여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이루었던 경륜가요 사상가였으며 문인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선인교(仙人橋) 나린 물이 자하동(紫霞洞)에 흘러 들어

반천년(半千年) 왕업(王業)이 물소리뿐이로다.

아이야 고국흥망(故國興亡)을 물어 무삼하리오.

 

이 시조는 474년간 지속되던 고려왕업이 허망하게 무너졌음을 담담하게 표현한 회고가(懷古歌)다. 초장에는 개성 송악산에서도 가장 경치가 아름답다는 자하동과 거기에 놓인 선인교 아래로 흐르는 물을 제시하여 찬란했던 고려의 왕업이 오래도록 번창했음을 표현하였다. 중장에는 오백년이라 하지 않고 반천년이라 하여 고려왕조가 장구했음을 강조하고 그 오랜 왕권이 무너지고 한갓 계곡 물소리만 남았다고 하였다. 초장에서 유구한 역사를 함축했던 물이 중장에서 허망함의 상징으로 바뀌었으니, 같은 사물에다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시킨 시적 기교가 범상치 않다. 종장에는 망해버린 왕조에 대한 그리움이나 감상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여 과거 지향의 정서를 차단해 버렸다. 그는 새 왕조를 창건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러니 망해 버린 왕조에 연연하는 태도나 정서는 바람직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유교 이념에 따라 기초를 닦아가는 조선의 앞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인교 자하동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망해버린 왕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말이다.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 건설에 몸을 바친 개혁가의 내면의식이 은연중에 드러난다고 하겠다.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지란의 시  (0) 2020.08.25
조준의 시  (0) 2020.08.25
원천석의 시  (0) 2020.08.25
이직의 시  (0) 2020.08.21
맹사성의 시  (0) 202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