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원천석의 시

김영도 2020. 8. 25. 10:44

원천석(元天錫)은 고려말에 나서 조선초까지 살았으나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의하면, 호를 운곡(耘谷)이라 하였으며, 진사에 급제했지만 고려가 기울어짐을 보고 원주 치악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이색과 왕래하고 시를 주고받으며 시국을 개탄했다. 이방원을 가르친 바가 있어 태종이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야사를 지었는데 자손들이 후환을 두려워하여 태워버렸다고 한다. 시조 2수가 전한다.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턴고.

굽을 절(節)이면 눈 속에 푸를소냐.

아마도 세한고절(歲寒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사군자의 하나인 대의 절개를 세한고절이라 하여 찬양한 것이다. 초장에서는 눈을 맞아서 휘어진 대를 지조 없이 굽었다고 못하는 것처럼 왕조 전환의 시운을 만나 어쩔 수 없이 조선조에 살고 있는 자신을 누가 지조가 없다고 하겠느냐고 하여 부득이한 환경에 처한 대의 경우를 끌어와서 자신은 무절조하지 않다는 것을 설의로 주장하였다. 중장에서 시세에 굽힐 절개라면 눈 속에서도 푸른 대처럼 자신의 지조도 차라리 꺾일지언정 굽히진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종장에서 대야말로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도 홀로 지조를 지키는 세한고절의 본보기라는 것이다. 시인은 눈 맞은 대가 차가움 속에서도 푸르른 것을 보고 마치 자신이 어려운 세월 속에서도 지조를 지켜 은둔하고 있는 처지와 유사하다고 보아 동일시하였다. 자신의 처지를 눈 맞은 대나무에 투사한 것이다. 그는 고려말에 벌어진 역사의 진실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자손들이 조선의 역사에 저촉됨을 두려워하여 그 기록을 없앴다고 한다. 그런 만큼 그는 고려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적극적 충절을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당시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과 새 왕조에 출사치 않고 은둔으로 지조를 지키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이 시는 이른바 회고가(懷古歌)다. 망해 버린 고려 왕조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표현한 노래다. 초장은 고려 왕조의 멸망에 대한 감회를 담담하게 표현하였다. 앞 구는 서술이고 뒤 구는 은유다. 한 왕조가 흥했다가 망하는 것이야 그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서 고려의 왕궁이었던 만월대가 지금 가을 풀처럼 시들어 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적인 이치라는 것이다. 아마도 고려가 망한 지 한참 되어서 왕조 멸망에 대한 절박한 상실감이 약간은 무뎌진 후의 정서인 듯하다. 중장에서는 이렇게 담담한 정서가 서서히 슬픔으로 옮아가는데, 오백년 이상 지속되었던 왕조가 이제는 폐허가 되어 목동의 피리소리로나 그 서글픔을 나타내게 되었다고 하여 고려의 멸망에 대한 슬픔을 차츰 드러내고 있다. 종장에서는 작중화자를 석양에 지나가는 객이라고 하여 고려왕조가 폐허로 변해 버린 일을 객관화하고 있지만, 사실은 작중화자가 먼저 비탄에 빠져버렸다. 중장에서 서글픔으로 내면화되었던 서정이 종장에 와서 그것은 바로 시인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드러난 것이다. 원천석은 고려의 신하로 살려했던 것 같다. 태종의 부름을 거절했음이 이를 증명한다. 고려에 대한 지조를 지킨 그가 망해 버린 왕조의 궁궐을 찾았을 때의 깊은 슬픔이 이 시에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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