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덕지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42

최덕지(崔德之, 1384-1455)는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이다. <국조인물고>와 <연려실기술>에 보면, 호는 연촌우수(烟村迂叟)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태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사관을 거쳐 삼사(三司)의 벼슬을 역임했다. 함양, 김제 등의 군수를 지내고 남원부사가 되었다가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으로 물러나 당호(堂號)를 존양(存養)이라 하고 학문을 연구했다. 문종이 불러서 예문관 직제학을 삼았으나 이듬해 늙었다며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선비들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기미를 알고 몸을 보전하였다며 그의 지혜와 학문과 절개를 칭송했다.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청산이 적요(寂寥)한데 미록(麋鹿)이 벗이로다.

 약초에 맛들이니 세미(世味)를 잊을로다.

 벽파(碧波)로 낚싯대 둘러메고 어흥(漁興)겨워 하노라.  

 

이 시는 아마 남원부사를 그만두고 영암으로 물러가 존양(存養)이라 당호를 짓고 전원에서 생활하던 때에 지었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본성을 보존하고 기른다는 당호를 내걸고 학문과 전원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았을 때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에는 현실을 잊고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초장에는 청산에서 사슴과 벗하는 자연 속의 생활을 말했고, 중장에는 자연에 묻혀서 사는 생활이 생명에 이로운 약초의 맛과 같아서 세속적 현실의 즐거움은 끊어버렸다고 했다. 종장에는 전원에서 고기잡이하는 흥취가 자신의 삶의 의미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는 이렇게 전원에 사는 즐거움을 알았기에 문종이 불러 다시 벼슬길에 나갔으나 왕은 병약하고 세자는 어렸으며, 여러 대군은 강건하여 정국이 소용돌이칠 것을 예견하고 68살의 나이를 핑계삼아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의 피비린내나는 왕위찬탈에 연루되지 않고 몸과 이름을 보전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강호(江湖)의 생활이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지혜와 관련됨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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