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황희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40

황희(黃喜, 1363-1452)는 조선 초기 왕권과 문물제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명신이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와 <문종실록>에 실린 황희의 졸기에 의하면, 호는 방촌(尨村)이고 본관은 장수이다. 고려말에 벼슬에 나가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태조가 개국한 후에 세자 우정자가 되고 태종 때에는 이조정랑이 되었다. 태종의 신임을 받아 민무구, 민무질 등을 제거하였고, 47살에 참지의정부사와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지의정부사와 대사헌을 거쳐 다음해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냈다. 병으로 위급해 지니 태종이 어의를 명해 치료하고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치게 하였다. 이후 세자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평안도 도순문사로 나갔고, 다시 판한성부사가 되었으나 세자의 폐위와 함께 서인이 되어 교하로 폄출되었다가 남원으로 옮겨졌다. 세종 즉위 후 의정부 참찬이 되고 강원도의 기근을 구휼한 공으로 판우군 도총제부사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찬성과 대사헌을 겸했다. 그 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87살(세종31년)에 치사할 때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으로서 세종의 치세를 도왔다. 그는 생김새가 크고 총명하였으며, 성품이 관대하고 무거우며 기쁨과 슬픔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고, 일을 처리함이 정대하고 대체를 보존하여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생활은 검소하였고 예법은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랐다. 성품이 너무 관대하여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고,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란다는 비난이 있었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그의 시조로 사시가(四時歌) 4수가 전한다.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이 몸이 일이 하다.

 나는 그물 깁고 아이는 밭을 가니

 뒤 뫼에 엄긴 약을 언제 캐려 하느니.

 

 삿갓에 도롱이 입고 세우중(細雨中)에 호미 메고

 산전(山田)을 흩매다가 녹음(綠陰)에 누웠으니

 목동(牧童)이 우양(牛羊)을 몰아다가 잠든 나를 깨와다.

 

모두 4수의 시조를 두 수씩 묶어서 살펴보자. 첫 수는 봄이 되어 일을 재촉하는 내용이고, 둘째 수도 여름에 쉬지만 말고 김을 매라는 내용이다. 작중화자인 농부가 봄여름에 바삐 농사짓는 생활을 읊은 것이다. 첫 수의 초장에서 봄이 되면 농촌에 할 일이 많다고 했고, 중장에서 그물도 손질하고 밭도 갈아야 하는 바쁜 형편을 말했으며, 종장에서 그나마 뒷산의 약초 깨기는 손이 모자라서 걱정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봄이 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농민의 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둘째 수의 초장은 여름날 비 내릴 때에도 김을 매어야 하는 나날을 말했고, 중장에는 가난한 농민이 비탈 밭을 매다가 잠깐 그늘에서 쉬는 것을 그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여유도 아깝기 때문에 목동이 소와 염소를 모는 소리에 깨어나서 다시 일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 마디로 봄여름의 바쁜 농촌 풍경을 표현하였다. 시인은 왜 이렇게 농민의 빠쁜 일상을 부각시키고 있는가. 그것은 국가의 근본인 농업을 권장하는 뜻에서다. 세종 때 <농사직설>을 편찬하여 농법을 개량한 만큼, 농본정책으로 왕조의 기초를 확립하려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인 그가 이렇게 농민을 독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조(大棗)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듯들으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내리는고

 술 익자 체 장사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뫼에는 새 다 긏고 들에는 갈 이 없다.

 외로운 배에 삿갓 쓴 저 늙은이

 낚대에 맛이 깊도다 눈 깊은 줄 아는가.

 

가을과 겨울을 읊은 두 수는 봄여름을 읊은 두 수와는 달리 여유롭고 한가하다. 원래 농촌이 봄여름에 바쁘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풍요롭고 한가해지기 때문이다. 첫 수의 초장은 대추가 붉게 익고 밤알이 떨어지는 풍요로운 풍경이고, 중장도 벼를 수확한 논바닥에 여름내 살찐 게를 제시하여 가을의 넉넉한 농촌을 묘사했다. 그러니 종장에서 술을 걸러 마시고 봄여름에 농사짓느라 힘들었던 노고를 취흥으로 달래본다는 것이다. 둘째 수의 초장에는 차가운 겨울이 와서 인적도 그치고 새들도 날지 않는다고 하고, 중장에서 오직 외로운 어옹(漁翁)만이 물위에 배를 띄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종장에서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낚시하는 전원생활의 깊은 맛을 즐기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시는 당나라 시인 유종원의 ‘강설(江雪)’ “천산의 새는 그치고 온갖 길에 사람 자취 없다. 외로운 배에 삿갓 쓴 늙은이는 눈 내리는 강 위에서 홀로 낚시질 하네.”(千山鳥飛絶 萬徑人蹤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라는 시와 아주 비슷해서 그것을 번안한 것이라고 하겠다. 앞에서 살펴본 ‘사시가(四時歌)’ 4수는 농경시대에 봄이 되면 싹이 터 자라나고 여름이면 성장하여 무성해지고 가을이 되면 열매 맺어 수확하고 겨울에는 갈무리해 두고 한가로움을 즐기는 사철의 순환하는 이치에 맞추어 시를 펼쳐놓은 것이다. 비록 번안한 것이 있긴 하지만 농본 국가의 기본 원리를 시조로 펼친 시인의 도량과 여유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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