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길재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43

길재(吉再, 1353-1419)는 고려에 의리를 지켜 조선에 벼슬하지 않고 후진양성에 힘써 성리학의 학통을 김숙자(金叔滋)에게 전하여,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에게 이어지게 한 사람이다. <야은집(冶隱集)>과 <정종실록>에 의하면, 호는 야은(冶隱)이고 경상도 선산 사람이다. 18살에 개경에서 이색과 정몽주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생원시와 사마시를 거쳐 34살(우왕1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박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37살(창왕1년)에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이듬해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선 정종 때 세자 이방원이 불러 왕이 태상박사를 삼았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사양하고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의 시조 1편이 전한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시도 고려왕조에 대한 회고를 읊은 것이다. 초장은 오백년 동안 번성했던 개성을 한 마리 말에 의지하여 돌아보았다고 하여 망한 옛 왕조를 잊지 못해 그 자취를 다시 둘러본 것을 표현하였다. 중장은 둘러본 결과를 말한 것이다. 산천은 예처럼 변함없는 모습인데 당시에 고려를 움직이던 인물들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 당나라의 시인 두보가 ‘춘망(春望)’이라는 시에서, 안록산의 난리가 지난 후의 폐허를 “나라는 깨어졌는데 산과 물은 그대로 있네.(國破山河在)”라고 읊었던 정감과 비슷하다. 종장에는 고려에 대한 그리움을 허망한 꿈이라고 했다. 비록 그가 벼슬한 때가 조선시대 사람들이 왕씨가 아닌 신(辛)씨라고 의심했던 시절이고, 그가 종사했던 벼슬이 종7품의 문하주서에 불과했지만 그는 자신이 받들었던 고려왕조를 태평스러웠던 시절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고려말의 혼란기를 태평연월이라고 말하는 것은 고려에 대한 강한 애정이 없이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지나간 세월이니 무의미하게 뱉은 말이라고 보기에는 그의 삶이 그런 시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고려에 대한 절의를 끝까지 지켰고, 그러한 삶에 어울리게 고려왕조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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