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서견의 시

김영도 2020. 8. 25. 10:54

서견(徐甄)은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의 문신이다. <고려사>와 <전고대방(典故大方)>에 의하면, 호는 여와(麗窩)이고 본관은 이천(利川)이며 안향(安珦)의 문인이다. 공양왕 3년(1391)에 사헌장령(司憲掌令)이 되어 대사헌 강회백(姜淮伯) 등과 함께 조준(趙浚)과 정도전(鄭道傳)을 탄핵하였는데, 정몽주가 살해되자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장류(杖流)되었다. 조선 개국 후 풀려나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나 금천(衿川)에 은거하며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시조 1수가 전한다.

 

암반(岩畔) 설중고죽(雪中孤竹) 반갑고도 반가워라.

묻노라 고죽(孤竹)아 고죽군(孤竹君)이 네 어떤 인가.

수양산(首陽山) 만고청풍(萬古淸風)에 이제(夷齊) 본 듯하여라.

 

서견의 생몰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천현(衿川縣) 조에 서견이 이곳에 퇴거(退居)하였는데 이태조가 창업하여 한양에 도읍하자 이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천년의 신도(神都)는 한강 너머에 있고, 충량(忠良)한 선비들 밝은 임금 도왔네. 삼국을 통일한 공은 어디에 있는고. 전조(前朝)의 왕업이 길지 않았음을 한스러워 하네.(千載神都隔漢江 忠良濟濟佐明王 統三爲一功安在 却恨前朝業不長)” 여기에서 말하는 천년의 신도(神都)는 송도(松都)를 뜻한다. 따라서 충량한 선비들도 당연히 고려 임금을 도운 고려신하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는 망해버린 고려 왕조를 추모하여 지은 작품이다. 그래서 이태조의 신하가 된 자들이 그를 벌주자고 하였으나 태조는 고려의 충신으로 덮어두었다. 이 시조도 서견의 고려조에 대한 충절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초장은 바위 옆에 서있는 눈 덮인 대나무를 등장시켰는데 그것은 물론 자기 자신의 투영이다. 그래서 반갑고도 또 반갑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엄혹한 추위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견디는 이 설중고죽(雪中孤竹)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띠고 있는가. 이것을 중장에서 밝힌다. 곧 고죽은 바로 고죽군(孤竹君) 백이숙제(伯夷叔齊)와 연관되므로 ‘그가 어떤 이던가.’라고 설의(設疑)로 주의를 환기시킨다. 종장에서 백이숙제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면서 자신의 자세도 이와 한가지임을 아울러 언명하는 것이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열전(列傳)에 실린 대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종주국인 은(殷)나라를 정벌하려는 것을 말리다가 은나라에 절의를 지켜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으며 일생을 마쳤다는 청백한 충절의 표상이다. 수양산에서 전조(前朝)에 대한 절의를 지켜 굶어 죽은 백이숙제의 만고에 드리운 충절은 바로 자기 자신이 따르고자하는 행동지침이라고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는 안향(安珦)의 문인으로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자답게 멸망한 고려조에 대한 충성을 밝히고 조용히 초야에 숨었던 것이다.

위에서 살핀 고려말의 시인들은 대개 신유학을 공부하여 그것을 당대에 적용시키려 했던 인물들이거나 기울어가는 고려왕권을 붙들려고 노력한 사람들이다. 고려말의 시조는 이들 사대부들이 창안하고 보급한 문학인만큼 당시의 현실과 그들의 의식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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