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이조년의 시

김영도 2020. 8. 25. 11:05

이조년(李兆年)은 고려 원종 10년(1269)에 나서 충혜왕 4년(1343)에 죽었다. 그러니까 우탁보다 6년 뒤에 나서 1년 뒤에 죽은 동시대의 후배인 셈이다. 이조년은 호를 매운당(梅雲堂)이라 했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고 벼슬은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고려사> 열전 이조년 조에 보면, 어려서부터 마음이 굳고 도량이 넓었으며 학업에 전념해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그 능력이 빼어나서 부사(府使)가 사위로 삼기까지 했다고 한다. 충렬왕 때 벼슬에 나갔다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왕위 계승의 알력과 혼란 속에서 죄 없이 유배를 당하기도 하고 13년간 고향에 은거하기도 하다가 충숙왕이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 원나라의 중서성(中書省)에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여 풀려 나오게 하기도 했고, 또 충혜왕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성산군에 봉해지고 벽상(壁上)에 얼굴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충혜왕의 방탕을 충고하고 바른 정치를 직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조년은 체구가 작고 성품이 정한(精悍)하고 강직하여 오히려 남의 꺼림을 당했으며, 담이 크고 과감해서 직언을 서슴없이 했으므로 왕도 그의 발자욱 소리만 듣고도 모습을 바르게 했다고 한다. 그는 바로 직간신(直諫臣)의 풍모를 지닌 인물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의 시조는 너무도 잘 알려진 다음의 작품이 있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一枝) 춘심(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 시조에서 보듯이 시조에 비로소 시인의 한시적(漢詩的) 교양이 스며들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초장에서 배꽃에 달빛이 희고 은하수는 한밤중에 이르렀다는 상황을 제시하는 어휘도 그렇고 제시된 분위기도 그렇다. 또 분위기는 어슴프레한 달밤의 박명(薄明)이다. 비록 한밤중이고 달빛이 휘영청한 달밤이라지만 그것은 밝음과 어둠의 중간이다. 중장에도 한문 교양을 전제로 한 비유요 상징이다. ‘일지춘심(一枝春心)이란 한 가지의 봄 흥취이니, 봄밤의 낭만적 흥취를 배꽃 한가지에 빗댄 비유이고, ‘자규(子規)란 소쩍새이지만 촉나라의 망제(望帝)가 망해 버린 나라를 못 잊어서 그 영혼이 새가 되어 피를 뿌리며 운다는 피맺힌 한의 상징이니, 이런 한문화적 고사를 알아야만 내용을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면 이 작품의 내용을 검토해 보자. 이 시조의 숨은 뜻을 푸는 열쇠는 ‘일지춘심(一枝春心) ‘자규(子規)라는 말이 환기시키는 상반되는 정서에 있지 않을까 한다. 바꾸어 말하면 봄밤의 낭만적 정서와 나라의 운명에 대한 피를 말리는 근심, 이 두 가지 대립되는 정서가 이 작품의 핵심인 것이다. 초장의 분위기가 밝음과 어둠의 중간이라고 이미 말했고, 이러한 분위기에 두 가지 상반되는 정서가 제시되었다. 그러니 이런저런 생각으로 이리뒤척 저리뒤척 ‘다정(多情)도 병인 것이다. 물론 시인은 초야에 물러나 현실 정치에 참여할 처지가 아니므로 그러한 생각을 접어두려 했다. 봄밤의 흥취를 자규는 모르리라고 한 말은 봄밤의 흥취로만 가득 채우고 싶은 소망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은 박명의 어둠처럼 두 가지 정서가 서로 엇갈려서 다정이 병이 된 것이고, 그래서 잠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종장에서 그가 현실 정치에 대한 근심을 잊고 낭만적 정취에 들떠서 다정으로 잠못든다고 했다면 이 시의 운치는 반감(半減)되고 말 것이다. 그러한 상황은 시인의 생애에 비추어 보아도 맞지 않는다.

이 시조는 한시 교양의 측면이 짙게 배어 있기는 하지만, 상황 제시의 탁월성이나 내면 묘사와 그 은유적 형상화가 가히 절창(絶唱)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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