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성여완의 시

김영도 2020. 8. 25. 10:49

성여완(成汝完, 1309-1371)은 호를 이헌(怡軒)이라 하였고,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태조실록>에 있는 그의 졸기(卒記)에 보면, 27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충주 목사 등을 거쳐 공민왕 때 민부상서(民部尙書)가 되었지만 신돈(辛旽)이 몰락할 때 그 일당으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그 후 우왕 때 정당문학에 올라 창녕부원군에 봉해졌지만,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살해되자 고려의 국운이 시들었음을 알고 포천(抱川) 왕방산에 들어가 은둔하였다. 태조가 회유책으로 벼슬을 내렸으나 고사하였다. 그는 성품이 간결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식들을 법도 있게 가르쳤다. 그의 아들은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성석린(成石璘)이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그는 신돈의 개혁 정치에 동참했다가 기존 세력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하고 어려움을 당했으며, 나중에 정당문학에 발탁되었지만 이성계의 왕조창업에 참여하지 않고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시조를 보자.

 

일 심어 늦이 피니 군자의 덕이로다.

풍상(風霜)에 아니 지니 열사(烈士)의 절(節)이로다.

세상에 도연명(陶淵明) 없으니 뉘라 너를 알리오. 

 

이 작품은 국화를 읊은 것이다. 국화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선비들이 그 아름다움을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면서 좋아한 꽃이다. 늦가을 서리를 무릅쓰고 꽃을 피우는 것을 관념화하여 어려운 시절에도 지조를 굽히지 않는 선비의 행동 양식을 표상한다고 본 것이다. 사물에다 자신의 지향을 투사하여 존숭(尊崇)하는 대상으로 삼았다고 하겠다. 초장에는 일찍 심어 늦게까지 꽃을 피우니 국화가 군자의 덕을 지녔다고 하였다. 왜 군자의 덕을 지녔다고 하였는가. 그 대답은 중장에 있다. 중장에는 모진 바람과 차가운 서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열사의 절개 곧 오상고절을 지녔기 때문에 국화가 군자의 표상이 된다는 것이다. 종장에서는 국화의 덕을 알고 사랑했던 진(晉)나라 도연명 같은 사람이 당시에는 드무니 누가 이 꽃이 상징하는 바를 좋아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를 음미해 보면 먼저 군자를 이상적 인간상으로 설정한 유교적 관념이 점차 보편화되는 사정을 확인할 수가 있고, 다음으로 왕조 전환기라는 시대상황에서 열사의 절개를 지닌 인물이 별로 없다는 자신의 시국관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시란 시대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므로 당대의 가치관이 서서히 유교적으로 바뀌어 가는 사정을 보여 주면서, 또 정치현실의 변화 속에서 진정으로 유교적 덕목을 실천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개탄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유교적 가치관을 존중한다면서 두 왕조를 섬기는 조선 창업공신의 무절조에 대하여 심각하게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보이므로 그의 만년에 지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시조에서 비로소 선비의 지조라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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