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정몽주의 시

김영도 2020. 8. 25. 10:58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고려왕조와 운명을 함께한 충신이다. <포은집(圃隱集)>의 연보에 의하면, 그는 19살 때의 부친상과 10년 후 모친상에 삼년씩 시묘를 살았다. 24살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에 수찬이 되었고, 그를 뽑아준 김득배(金得培)가 간신에게 해를 입어 죽자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동북면의 여진족 정벌에 종사관으로 참여하였고, 성리학에 정통하여 성균박사로 강설했는데, 대사성 이색이 "정몽주의 논리는 횡설수설이라도 이치에 다 맞으니 동방 이학의 조(祖)로 해야겠다."는 칭찬을 받았다. 36살에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 후 경상도 안렴사를 거쳐 예문관 직제학,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명나라 사신을 죽인 사건이 일어나 다들 명나라에 가기를 꺼릴 때 그가 가서 해명하고 돌아왔다. 권신 이인임의 친원정책에 반대하다가 하옥되었고 언양으로 유배되었다. 41살 때 일본에 건너가 협상을 하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포로 수백명을 데리고 돌아왔고, 그 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를 따라가 운봉에서 왜구를 물리쳤고, 첨서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가 되었다. 또 조공 문제와  시호 문제로 두 번 명나라에 다녀왔다. 47살에 동북면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싸움터에 나갔다. 이듬해 정당문학이 되었고, 그 후 다시 명나라에서 조공을 트집 잡자 그는 "임금의 명은 물불이라도 피할 수 없다."며 명나라에 가서 조공을 줄이고 돌아왔다. 51살에 영원군(永原君)에 봉해지고, 그의 건의로 관복을 명나라식으로 바꾸었다. 다음해에는 권세가의 사전(私田)을 혁파하자고 했으며, 문하찬성사가 되었다. 공양왕 2년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어 군국기무를 처결하였으며, 주자가례에 따라 예속(禮俗)을 일으키고 5부학당과 향교를 재건하며, 수령의 상벌을 엄격히 하여 국가기강을 세우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고려말의 어려운 시절을 당하여 국내외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 했고, 성리학과 중국문물을 힘써 받아들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조를 보자.

 

 이 몸이 죽어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작품은 문집에 한역가로도 실려 있는데 조선 때의 효종은 달밤에 이 시를 읊고 그 충절에 감동했다고 한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후에 정몽주와 김진양이 몸을 바쳐 고려의 사직을 붙들었다. 이성계가 정몽주의 협조를 얻으려 했으나 그 마음을 몰랐는데, 이방원이 잔치를 열어 ‘하여가(何如歌)’를 부르니 정몽주가 이 노래를 불러 그 마음을 밝혔다는 것이다. 초장에서는 죽음이라는 극한상황을 반복적으로 말하였는데, 이는 앞에 닥친 현실이 피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임을 강조하고, 또 ‘하여가’의 권유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 답변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중장에서는 극한상황을 한 단계 더 높여서 백골이나 넋마저도 흔적없이 완전한 무(無)로 돌아간 상태를 가정하였다. 물론 이같은 상황을 가정한 것은 종장의 일편단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종장에서는 이러한 무(無)의 지경에 이르러서도 고려 임금에 대한 충성심만은 변할 수가 없다는 지절(志節)의 절대 경지를 표출했다. 사실, 혼백마저 없는 지경에서 충성심이 있을 수가 없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역성혁명은 인정할 수가 없고 어떠한 회유에도 굴복할 수 없으며, 오직 고려가 있을 뿐이라는 역설을 넘어서는 자신의 절대적 신념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 그의 단호한 심중을 드러내게 한 이방원의 ‘하여가’를 살펴보자.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혀진들 긔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포은집>의 유사(遺事)에 의하면,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 잔치를 열어 정몽주를 청하여 이 노래를 불러 그의 마음을 떠보니 정몽주가 ‘단심가(丹心歌)’를 불러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밝혔다. 그래서 이방원이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성계가 사냥에서 부상을 당하여 누웠을 때 정몽주가 위문하고 그 일파의 기색을 살펴보고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주막에 들러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면서 ‘오늘 날씨가 사납다’고 하였다. 그리고 귀가 도중에 미리 매복해 있던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 시조의 초장은 상대방의 가치관을 희석시키는 회유의 시작이다. 왕씨면 어떻고 이씨면 어떠냐는 뜻을 감추고 있는 말이다. 중장은 만수산 드렁칡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끌어와서 옳고 그름이나 좋고 싫음을 가리지 말고 칡넝쿨처럼 얽혀서 살자는 회유의 노골화다. 종장은 이렇게 서로 동화해서 함께 일생동안 복록을 누리자는 다짐이요 약속이면서 또한 뒤집어 생각하면 강요이고 위협이다. 본뜻을 슬쩍 감추고 상대의 본심을 탐색하면서 회유하는 정치적 술수가 능란한 언어기교로 표출되었다. 이런 회유에 정몽주는 오직 ‘단심가’로 맞섰던 것이다. 이러한 고려말의 정치적 회오리를 예감하고 경계한 정몽주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시조도 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올세라.

 청강(淸江)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러일까 하노라.

 

이 노래는 정몽주의 어머니가 지었다고도 하고 정몽주가 지었다고도 전한다. 아마도 정몽주의 충절에 감동하여 그의 몸가짐을 염려한 어머니의 심정에 가탁한 후대의 작품이 아닐까 의심스럽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으므로 전하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우선 우화적 설정이 새로운 기법으로 등장했다. 초장에서 까마귀는 권세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무리이고 백로는 흰 깃처럼 정결한 몸가짐을 가졌다면서 백로더러 싸우는 무리에 섞이지 말라고 했다. 작중화자는 백로 편을 들고 있고 백로를 염려하여 달래는 어조를 띠고 있다. 중장에는 어머니가 염려하는 까닭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권세 싸움에 성낸 까마귀들이 고고하게 자신의 지조만을 지키는 백로의 흰빛 곧 정결한 태도를 질투하여 해칠까 두려워서라고 했다. 종장에는 까마귀가 백로를 시기 질투하는 이유를 다시 심화시켰는데, 그 이유인즉 까마귀처럼 새까맣지 않고 바꾸어 말해서 몸을 새까맣게 더럽히면서 권세와 이익 다툼에 매달리지 않고, 맑은 강물에 씻은 몸처럼 깨끗하고 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깨끗한 몸을 까마귀 가까이 가서 더럽히지 말라는 어머니의 염려와 걱정을 드러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런 말은 정몽주의 어머니만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자식을 염려하는 어느 어머니라도 할 수 있는 말이다. 다만, 이 시조를 정몽주의 어머니에게 해당시켰을 때 비로소 역사적 진실성과 아주 그럴듯한 핍진성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 시조에서 인간사를 우화로 표현하는 기법의 발전을 볼 수 있고, 고려말의 정치상황과 자식을 염려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연결시킨 작가의 의도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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