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이존오의 시

김영도 2020. 8. 25. 11:00

이존오(李存吾, 1341-1371)는 호를 고산(孤山)이라 하고 벼슬은 정언에서 그쳤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어려서 부모를 여위었지만 모습이 단정하고 과묵했으며 힘써 공부하고 뜻이 굳었다고 한다. 그를 기른 형이 도적에게 잡혀가서 죽자 여러 달 걸려서 형의 시체를 찾고 관에 고발하여 도적들을 다 잡았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 정몽주 이숭인 정도전 등과 강론하며 교유하였고, 정언이 되어 신돈(辛旽)을 탄핵하되 “요물이 나라를 그르치니 쫓아내지 않을 수가 없다”며 공민왕에게 극간하였다. 그래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었다가 공주 석탄(石灘)에 은둔 중 신돈의 세력이 날로 성하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해 병이 되어 31살로 죽었다. 이존오의 시조 2편을 보자.

 

 바람에 우는 머귀 베어 내어 줄 매오면

 해온남풍(解慍南風)에 순금(舜琴)이 되련마는

 세상에 알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이 시는 숨은 인재를 발굴해 쓰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의 삶과 연결지어 본다면,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희망을 걸었다가 신돈의 전횡에 실망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초장에서는 바람 속에서 자라는 오동나무를 베어서 줄을 맨다는 말로 초야에 묻힌 능력 있는 선비를 발굴해서 직책을 맡길 것을 소망했다. 중장에서 ‘해온남풍(解慍南風)’이란 말은 매서운 겨울 추위를 녹이는 훈훈한 봄바람이라는 뜻이고, 중국의 순임금이 오현금을 만들어 불렀다는 남풍가의 내용처럼 성난 백성의 마음을 풀어주고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봄바람같은 임금의 은덕을 말하는 것이다. 오동에 줄을 매면 순임금의 오현금이 되리라는 말은 숨은 선비를 찾아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토로이다. 그러나 종장에서는 세상의 형편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음을 아쉬워하고 슬퍼한다고 했다. 이 시는 순임금이 오현금을 켜면서 남풍가를 노래하여 백성의 마음을 달래고 태평성대를 이루어냈다는 <십팔사략(十八史略)>에 실린 고사를 알아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어쨌거나 시인은 숨은 인재가 새로운 시대를 열기를 바랐고, 그 인재는 신돈같은 급진 개혁가도 아니고 이성계같은 역성역명을 기도하는 신흥세력도 아닌, 고려에 충절을 지키면서 새 시대를 열어갈 사람들을 지칭한 것이라 하겠다. 그의 다른 작품을 보자.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덥나니.

 

이 시를 신돈을 풍자한 시로만 보는 것은 고정된 시각이다. 시의 생명은 고정된 시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소위 역동적 구조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열려 있는 시각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즉 문학 작품은 옛날 사람이나 요즘 사람, 동양 사람이나 서양 사람 누구에게나 제 나름대로 읽도록 개방되어 있어서 그 뜻이 역동적으로 변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시를 신돈을 풍자하는 시로만 읽어야 할 의무는 없다. 또 시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애매성, 바꾸어 말해 묘한 함축적 여운이나 다의성(多義性)을 추구하는 것이니 만큼 시가 내포하는 다의성을 충분히 즐기는 것이 시감상의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대체로 이 시는 세 가지쯤의 의미로 읽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먼저 자연 현상을 그대로 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어의 의미를 명시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구름이 임의로 다닌다’는 데 오면 문제가 발생한다. 자연 현상으로서의 구름이 임의로 다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름을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어떤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구름을 의인화한 것은 시인의 심정을 사물에 투사하는 수법으로 사람과 사물을 동일시한 것이다. 그러면 구름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이를 위해 이존오의 일생을 끌어와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시는 개인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니까. 그렇다면 구름은 당연히 신돈이다. 구름같이 무심한 척하면서 사실은 조정에 들어와서 제 마음대로 ‘광명한 날빛’인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있음을 울분으로 토로한 것이다. 그의 심정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 구름, 중천, 날빛 등의 상징이 신돈, 조정, 임금에게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이런 유추는 한문학에서는 흔한 것이므로 시인의 독창적 상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기는 하지만 시조에 처음으로 이런 상징이 나와서 후대에도 답습되었으니 그러한 점은 인정할 만하다. 구름을 신돈 개인에 국한 할 것이 아니라 간신이나 정치적 장애물로 일반화시킬 수도 있다. 당시는 신진 사대부들이 정주학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던 때인 만큼 불교에 대한 배척은 차츰 격렬해지고 있었고, 그들의 눈에는 승려란 유교 이념을 세상에 펴는 데 걸림돌이 되고 구름처럼 그늘이나 지우는 없애야 할 부류로 보였을 것이다. 사실 승려들은 ‘무심’을 지향하면서 운수(雲水)같이 임의로 매인 데 없이 다닌다. 그러면서도 막대한 전장(田莊)과 세력을 구축해 놓고 개혁의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이 시조의 의미를 자연의 현상을 관찰하여 그 묘리를 깨우치는 것으로 보거나, 이존오의 개인적 체험과 당시의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신돈의 전횡을 풍자한 것으로 보거나, 당시의 시대상과 결부시킨 승려나 더욱 일반화한 간신을 타도해야 한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보아야만 이른바 시의 다의성을 살릴 수 있고, 다양한 의미를 종합하여 이루어지는 시의 총체적 의미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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