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언(楊士彦, 1517-1584)은 명종,선조 때의 문신이요 서예가다. <연려실기술>과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자는 응빙(應聘)이고 호는 봉래(蓬萊)이며 본관은 청주다. 24살에 진사가 되고 부모의 상을 연이어 당했다. 30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평창군수, 강릉부사, 함흥부윤 등을 역임했다. 성균관 사성, 종부시정(宗簿寺正)을 거쳐 회양군수로 나갔다. 자연을 사랑하여 회양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에 자주 노닐었고, 금강산 만폭동에 그가 쓴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안변부사로 있을 때 지릉(智陵)에 불이 난 책임을 지고 황해도에 유배되었다가 2년 후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시문에 능했고 글씨를 잘 썼다.
태산(泰山)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를 높다 하더라.
이 시는 사람들에게 노력을 권장하는 노래로 너무 잘 알려진 작품이고 뜻하는 바도 평이하다. 초장은 중국 산동성에 있는 태산이 높다고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하늘 아래 솟은 산일뿐이라고 하여 한없이 하늘로 솟은 산이 아님을 전제하였다. 이 말은 당연히 세상의 모든 일이 유한한 것이라는 전칭판단을 함축하고 있다. 중장에서 그러니 오르고 또 오르면 언젠가는 꼭대기에 오르게 되고 따라서 어떤 일이라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역설(力說)하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르거나 노력하지를 못한다는 인간의 한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종장에서 그런 사람들이 중도에 포기하고서 산이 높다거나 그 일이 너무 어렵다거나 하여 한탄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