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송인의 시

김영도 2020. 8. 21. 14:58

송인(宋寅, 1516-1584)은 중종의 사위다. <선조실록>의 졸기와 <국조인물고>에 보면, 그의 자는 명중(明仲)이고 호는 이암(頤庵)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10살에 중종의 셋째 딸 정순옹주(貞順翁主)에게 장가들어 여성위(礪城尉)가 되었다. 젊어서부터 경학(經學)에 통달하고 예학(禮學)에 익숙하여 이황, 조식, 이민구, 정염, 이이, 성혼 등 당대의 명유들과 교유하였다. 의빈부(儀賓府), 충훈부, 상의원(尙衣院) 등에서 도총관을 역임하였고, 중국사신의 영위사를 맡았다. 풍채가 뛰어나고 사람됨이 단정 순수하며 겸손 근실하였으며 호화로운 환경에서도 가난한 사람처럼 살았다. 시문에 능하였고 글씨를 잘 썼다. 

 

 들은 말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 듯이

 내 인사(人事) 이러하매 남의 시비 모를로다.

 다만지 손이 성하니 잔 잡기만 하노라.

 

 한 달 서른 날에 잔을 아니 놓았노라.

 팔 병(病)도 아니 들고 입덧도 아니 난다.

 매일에 병(病) 없을 덧으란 깨지 맒이 어떠리.

 

 이렁저렁하니 이룬 일이 무슨 일고.

 허룽허룽하니 세월이 거의로다.

 두어라 이의이의(已矣已矣)거니 아니 놀고 어이리.

 

세 수가 모두 세상에 관심을 끊고 술이나 마시고 놀면서 세월을 보내자는 다분히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표출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어린 나이에 임금의 사위가 되어 귀한 환경에서 살았고, 행실을 단정히 하여 정쟁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며, 학문과 예술에 골몰하여 맑고 깨끗하게 일생을 보냈으므로 역설적으로 시련을 극복하여 세속적 성취감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첫 수는 보고들은 남의 일에 관심을 끊고 술이나 마신다고 하였다. 세상에 대하여 조심스럽고 남들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한 것은 개인적 특성도 있겠지만 중종-선조 연간의 험난한 정치현실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조심스런 처세를 반영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둘째 수는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허무주의적 태도를 표출하였다. 경학과 예학에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했지만 유교적 심성수양보다는 모든 것을 잊고 술에 취하는 쪽을 더 좋아한 모양이다. 평화와 안일은 권태와 유흥을 양성(釀成)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수는 자아성취가 없다는 심한 무력감에서 그것을 잊어버리려는 유락적(遊樂的) 태도를 보여준다. 이럭저럭 하는 일 없이 허룽허룽 세상을 살다보니 인생이 거의 지나갔으니 아니 놀고 어쩌겠느냐는 것이다. 지위가 부마이고 행실이 단정했다지만 지나친 허무감이나 겸손의 표출이 아닌가 싶다.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진이의 시  (0) 2020.08.21
양사언의 시  (0) 2020.08.21
노수신의 시  (0) 2020.08.21
이후백의 시  (0) 2020.08.21
이숙량의 시  (0) 202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