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2

서울특별시 서울둘레길 제8구간 북한산길(구파발역~도봉산역, 완결편)

김영도 2015. 7. 17. 15:12

1.위치     

구파발역/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2로 15-25

도봉산역/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 964-33

 

2.교통

(갈때)부개역~구파발역

(올때)도봉산역~부개역

 

3.코스

구파발역~은평뉴타운~선림사~북한산생태공원~탕춘대성암문~불심원~연화정사~성북생태체험관~빨래골지킴터~이준열사묘소~419국립묘지~봉황각~우이령길입구~연산군묘~정의공주묘~무수골~도봉탐방지원센터~도봉산역

 

 

 

 

4.상세설명

<북한산국립 공원>

북한산은 대보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약 1억 7000만 년 전 중생대 쥐라기에 형성된 화강암이 오랜 기간 풍화와 침식을 받은 결과 오늘날의 북한산 형태를 띠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북한산 국립공원에는 대략 1,3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종별로는 692종의 식물 자원을 비롯하여 오색딱따구리를 비롯한 조류 136종, 포유류 21종, 나비 등 곤충 1,106종 그리고 양서류 12종, 파충류 11종, 버들치를 비롯한 어류 6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특산식물인 산개나리도 자생하고 있다.
또한 북한산 국립공원은 100여 개의 사찰 및 암자를 비롯하여 과거 2000년간 우리 선조들이 전해준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곳곳에 있어 볼거리가 풍성하다. 특히 사적 제162호인 북한산성은 북한산 능선을 따라가며 성을 쌓고 요지마다 문을 세워 국가적 비상시를 대비해온 조상들의 노력과 흔적이 배어있는 산성이다. 삼국 시대 이래로 주요한 관방 시설로서 그 가치가 높으며, 조선 시대 왕의 임시 거처인 행궁지가 남아 있다. 북한산성은 특히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중심이 되어 수도 한양을 지켜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북한산 국립공원 골짜기마다 유명 사찰이 산재하고 있다.
북한산 국립공원에는 주봉인 북한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원효봉, 노적봉, 동장대, 남장대 등 여러 봉우리가 있다. 북한산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상장봉과 노고산으로 산줄기가 이어진다. 북한산 국립공원 북단 지역을 장식하고 있는 도봉산권은 상장봉과 우이령으로 그 남쪽의 북한산권과 나뉜다. 우이령은 도봉산 지역의 맨 남쪽에 있는데 마치 소귀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도봉산의 서쪽에는 오봉이라는 봉우리가 바짝 다가서 있다.

 

<국림4.19묘지>

1963년 9월 20일 약 3,000평으로 건립되었다. 한가운데 4·19혁명의 기상을 상징하는 높이 7척의 탑주 일곱 개가 솟아 있고, 주위에는 수호신상 및 각도를 달리한 20개의 만장이 조화를 이루었다.
조각은 김경승(), 탑문은 이은상(), 글씨는 김충현()이 맡았다. 1993년 10월부터 성역화 조성공사가 시작되면서 묘지크기는 약 40,000평으로 확장되었으며, 유영봉안소, 4·19탑, 상징문, 상징조형물로 조성되었다. 유영봉안소는 100평의 목조 한식 건물로 넓혀졌고, 4·19탑과 만장은 원형태로 묘역의 중심으로 옮겨놓았고, 4·19정신을 형상화한 3개의 조형물이 새로 만들어졌다.

진입로 앞에 세운 ‘민주의 뿌리’는 9개 기둥의 화강암 조형물로 민주주의 발원지임을 뜻하고, 중앙 양측에 마련된 청동재질의 ‘자유투사’는 독재정권에 항쟁하는 모습을 담았으며, 화강암 재질의 ‘정의의 불꽃’은 높이 9m의 불꽃형상으로 4·19의 정신을 뜻한다.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산9-1번지에 있다.

 

<연산군>

1476년(성종 7) 11월 7일 성종의 맏아들(적장자)로 출생하였다. 당시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는 성종()의 첫번째 후궁이었으며 이후 연산군을 잉태하면서 비로 책봉되었다. 이름은 이융(㦕)이고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서연()을 통해 세자로서 수업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적인 소양은 선대 왕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1494년 성종이 사망하자 조선의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이후 신승선(), 노사신() 등 대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였으나, 선왕의 명복을 비는 불교식 행사인 수륙재() 시행과 외척의 등용을 두고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유생들과 갈등을 빚었고 즉위 1년 후 폐모 윤씨사건의 전말을 알게된 후 방치된 윤씨 능묘 천장()두고 삼사와 대립하였다. 이런 정치적 상황은 국왕(연산군)과 삼사는 더욱 갈등과 대립속으로 치달았다. 재위 4년인 1498년 7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의 내용이 세조를 비판하고 붕당을 만들어 국사를 어지럽게 했다는 조의제문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문제삼아 훈구파() 이극돈() ·유자광() 등은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했으며,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많은 신진 사류()와 삼사에 속한 대간들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조선시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국왕(연산군)과 갈등을 빚으며 왕권을 견제했던 삼사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이후 국왕(연산군)은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자신의 관심인 사냥과 사치를 즐겼고 국고의 사정은 나빠졌다. 1504년에는 손녀를 궁중으로 들이라는 연산군의 명을 거역하였다는 죄목으로 경기도관찰사를 지내던 홍귀달이 숙청되었다. 이 사건은 확대되어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문제로 번졌다. 성종의 후궁인 정씨() ·엄씨()의 모함으로 윤씨가 내쫓겨 사사()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을 부관참시()하는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또 국왕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使) ·채청사(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에 빠졌다. 경연()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을 폐지해서 언로()를 막는 등 그 비정()은 극에 달하였다. 급기야 1506(중종 1) 성희안() ·박원종() 등의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폐위된지 두달만에 역질로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그것은 선조 이후 다시 붕당() 및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한편으로는 임진 ·병자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5.탐방일자 

2015.07.08(수)

 

6.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7.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