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2

인천광역시 강화도 탐방기(강화나들길 제5구간 고비고갯길20.2k 강화버스터미널~외포여객터미널)

김영도 2014. 9. 9. 10:20

1.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222 와 내가면 외포리 일대

 

2.교통

(갈때)부평역정류장에서 90번 버스로 강화터미널

(올때)외포여객터미널에서 31번 버스로 강화터미널 도착후 90번 버스로 환승하여 부평역

 

3.코스

 

 

 

4.상세설명

<강화산성 남문>

이 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었던 4대문 중의 하나로 안파루라 불리며, 조선 숙종 37년(1711) 유수 민진원이 건립하였다.
강화의 내성은 고려 고종(1213∼1259, 재위) 때 축조한 토축성이었으며 그 규모가 커서 지금의 강화읍과 선원면에까지 걸쳤었다. 그후 조선 초기에 쌓은 성은 그 규모가 매우 작아 그 둘레가 4,200m에 불과하였다.
이 문은 1955년 5월 호우로 붕괴되었던 것을 1975년 문루와 성곽 일부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1976년에 강화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여장 및 순환도로를 개설하여 현재와 같이 정화하였다.

 

<강화산성 서문>

이 문은 강화성에 연결되었던 4대문 중의 하나로 첨화루라 불리는데, 숙종 37년(1711)에 당시 유수 민진원에 의해 건립된 것이며 현판도 그의 글씨이다.
문루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서 건평 14평이며 누상에 오르면 시내 일대를 바라볼 수 있다. 그뒤 퇴락되었던 것을 정조 20년(1796) 유수 김이익에 의해 중수된 바 있고 1977년에 개축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강화 홍릉>

홍릉은 고려 23대 고종(1192∼1259)의 무덤이다.
이 당시는 정치적으로 최씨 집권시기였으며 밖으로는 거란·몽골의 침입 등으로 고통받았던 시기이다. 고종 18년(1231)부터 여러 차례에 거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 유산의 손실 또한 매우 컸다. 고종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대장경을 만드는 등 문화상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남아있는 『고려대장경』이다.
원래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2단에는 사람형상을 한 조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무덤 주위에는 난간으로 두른 돌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무덤의 4모서리에는 짐승을 조각한 돌이 1개씩 배치되어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는 사람 모양의 돌조각 2구가 남아있다.
최근에 난간을 보수하고, 봉토 아랫부분에 능을 보호하는 돌을 설치하였다.
※(고려고종홍릉 → 강화 홍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강화 오상리 고인돌군>

1999년 4월 26일 인천광역시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되었다. 강화도 고려산(高麗山:436m)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해발고도 75m의 나지막한 산에 고인돌 12기(基)가 한곳에 모여 있다.
한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양식인 고인돌은 지석묘, 돌멘(dolmen)이라고도
하며 대체로 북방식·남방식·개석식 등의 3종으로 분류한다.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의 고인돌 가운데 인천광역시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는 내가 지석묘(內可支石墓)는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로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대형 판석 한 장을 덮은 모양으로 고인돌의 돌방[石室] 축조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원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밖의 고인돌은 거의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다. 오상리 고인돌군은 내가 지석묘를 중심으로 고려산 서남쪽 능선에 북방식과 남방식 고인돌이 고루 분포해 있다.

 

<강화 외포리 곶창굿당>

제당은 외포리 마을 언덕 위에 있으며, 당 안에는 중앙의 득제장군(得帝將軍, 득태장군)과 장군부인 그리고 산신, 상산대감, 군웅할아버지, 삼불제석, 창부, 별상님의 모두 여덟 신령을 모시고 있다.
외포리곶창굿은 당주무당을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사흘 동안 벌이는 큰 굿으로 주민의 참여도와 호응도가 높고 정성도 대단하다. 외포리곶창굿의 당주무당은 전형적인 강신무였던 전 당주무당 조화순의 대를 이어 현재는 정정애가 맡고 있다. 외포리는 농사가 주업인 대정(大井)마을과 어업이 주업인 정포(井浦)마을로 나뉘어 있지만, 주민들은 두 마을의 생업적인 특성 차이를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마을의 평안과 풍농과 풍어를 위해 모두가 합심하고 협력하여 굿을 지낸다.
그러나 외포리는 어선이 많고, 지리적으로도 위로는 옹진과 연평도, 아래로는 인천으로 연결되는 서해안 지역의 입지를 지니고 있어서 어촌의 모습이 더 강하다. 따라서 외포리곶창굿도 서해안굿(특히 황해도굿)의 형태를 많이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선주 중심의 풍어기원제 성격이 더 강하게 보인다. 이를테면, 외포리곶창굿에서도 서해안풍어제와 마찬가지로 선주들의 뱃기오름(봉죽 앞세우고), 선주굿, 기내림(길지 대신 무녀가 직접 뱃기에 신을 내림) 같은 제차가 있다. 또 봉기(봉죽)를 제당 마당에 세워놓는 것이나 무복에서 마래기와 꽃갓이 나오는 것, 작두타기를 하는 것이 서해안굿과 닮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춤사위와 굿거리 사설은 서울굿에 가깝고, 또 바닷가에서 수살맞이를 먼저 하고 마을의 우물들을 돌아 용왕굿을 마친 후에 당에 올라 본굿을 시작하는 굿의 진행 과정이 서해안굿과는 정반대이다.
외포리곶창굿은 보통 음력 2월 초순에 하는데, 이미 음력 정월 중순 전에 마을 대표와 당주무당이 협의하여 날을 정하고 당직이(현지에서는 당주로 부르며 마을에서 선정하여 대를 이음)를 도와 실무를 담당할 상소임, 중소임, 하소임을 뽑는다. 당직이와 소임들은 일주일 전부터 몸을 정갈하게 하고, 굿하기 3일 전부터는 제당 옆에 마련한 천막에서 자면서 제당을 깨끗이 청소하고, 소찬(메와 옥수)을 올리며 촛불을 밝힌다.
외포리곶창굿은 이른 아침 바닷가에서 하는 수살맞이굿부터 시작하는데, 이는 바다의 잡귀나 잡신을 막고 용왕님을 맞이하는 굿이다. 이는 곧 바다의 사고를 막기 위한 굿으로서 바닷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잡귀들을 풀어먹이는 의미이기도 하다. 수살맞이굿 때에는 바닷가에 솟대를 세워놓는데, 솟대는 큰 나뭇가지에 여러 마리 오리 모습의 새가 앉은 형태이다. 솟대를 세우는 것으로 보아 용왕님을 맞이하는 의미가 큰 것 같고, 그 외에도 바다를 통해 오는 다른 존신(尊神)들을 맞이하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수살맞이굿을 마치고는 마을을 돌아 현재의 우물이나 옛날 우물터들을 찾아 우물굿을 한다. 이를 우물용왕 또는 용왕굿이라고도 하며, 마을 재앙을 없애고 물이 잘 나오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굿이다. 예전에 우물은 이 마을 사람들의 생명과 같은 식수원이었다.
우물굿을 마치고 당에 오르는데, 중간의 길목에서 작은 고사상을 차려놓고 동네 부정과 당굿을 위해 잡인, 잡색들의 부정을 쳐낸다. 이를 거리부정이라고 하는데, 서서 하기 때문에 선부정이라고도 한다. 그리고는 이어서 당굿에 들어가는데, 이처럼 외포리곶창굿은 수살맞이굿, 마을우물굿, 거리부정(선부정), 부정거리(당안굿)를 거쳐 조상거리, 제석거리, 성주거리(성주모심), 장군거리(작두거리), 별상거리, 성주왕신거리, 대감거리, 창부거리, 선주굿, 기내림, 군웅굿, 막뒤놀음, 뒷전으로 이어진다. 외포리곶창굿은 종교적 의례로서 신앙성을 지니지만, 또 여기에서 파생되는 축제성과 시장 활성의 기능성을 함께 지니기도 한다. 특히 외포리 해변에는 어시장을 열고 있어 더 그러하다.

 

5,탐방일자

2014.09.08(월)

 

6.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7.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