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2

인천광역시 강화도 탐방기(강화나들길 제16구간 서해황금들녘길 13.5k 창우여객터미널~외포여객터미널)

김영도 2014. 9. 6. 20:06

1.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와 하점면 창후리 일대

 

2,교통

(갈때)부평역정류장에서 90번 버스로 강화터미널 도착후 31번 버스로 환승하여 외포리터미널에서 하차한다

(올때)창우리정류장에서 32번 버스로 강화터미널 도착후 90번 버스로 환승후 부평역에서 하차한다

 

3.상세설명

<강화외포리곶창굿당>

제당은 외포리 마을 언덕 위에 있으며, 당 안에는 중앙의 득제장군(得帝將軍, 득태장군)과 장군부인 그리고 산신, 상산대감, 군웅할아버지, 삼불제석, 창부, 별상님의 모두 여덟 신령을 모시고 있다.
외포리곶창굿은 당주무당을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사흘 동안 벌이는 큰 굿으로 주민의 참여도와 호응도가 높고 정성도 대단하다. 외포리곶창굿의 당주무당은 전형적인 강신무였던 전 당주무당 조화순의 대를 이어 현재는 정정애가 맡고 있다. 외포리는 농사가 주업인 대정(大井)마을과 어업이 주업인 정포(井浦)마을로 나뉘어 있지만, 주민들은 두 마을의 생업적인 특성 차이를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마을의 평안과 풍농과 풍어를 위해 모두가 합심하고 협력하여 굿을 지낸다.
그러나 외포리는 어선이 많고, 지리적으로도 위로는 옹진과 연평도, 아래로는 인천으로 연결되는 서해안 지역의 입지를 지니고 있어서 어촌의 모습이 더 강하다. 따라서 외포리곶창굿도 서해안굿(특히 황해도굿)의 형태를 많이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선주 중심의 풍어기원제 성격이 더 강하게 보인다. 이를테면, 외포리곶창굿에서도 서해안풍어제와 마찬가지로 선주들의 뱃기오름(봉죽 앞세우고), 선주굿, 기내림(길지 대신 무녀가 직접 뱃기에 신을 내림) 같은 제차가 있다. 또 봉기(봉죽)를 제당 마당에 세워놓는 것이나 무복에서 마래기와 꽃갓이 나오는 것, 작두타기를 하는 것이 서해안굿과 닮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춤사위와 굿거리 사설은 서울굿에 가깝고, 또 바닷가에서 수살맞이를 먼저 하고 마을의 우물들을 돌아 용왕굿을 마친 후에 당에 올라 본굿을 시작하는 굿의 진행 과정이 서해안굿과는 정반대이다.
외포리곶창굿은 보통 음력 2월 초순에 하는데, 이미 음력 정월 중순 전에 마을 대표와 당주무당이 협의하여 날을 정하고 당직이(현지에서는 당주로 부르며 마을에서 선정하여 대를 이음)를 도와 실무를 담당할 상소임, 중소임, 하소임을 뽑는다. 당직이와 소임들은 일주일 전부터 몸을 정갈하게 하고, 굿하기 3일 전부터는 제당 옆에 마련한 천막에서 자면서 제당을 깨끗이 청소하고, 소찬(메와 옥수)을 올리며 촛불을 밝힌다.
외포리곶창굿은 이른 아침 바닷가에서 하는 수살맞이굿부터 시작하는데, 이는 바다의 잡귀나 잡신을 막고 용왕님을 맞이하는 굿이다. 이는 곧 바다의 사고를 막기 위한 굿으로서 바닷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잡귀들을 풀어먹이는 의미이기도 하다. 수살맞이굿 때에는 바닷가에 솟대를 세워놓는데, 솟대는 큰 나뭇가지에 여러 마리 오리 모습의 새가 앉은 형태이다. 솟대를 세우는 것으로 보아 용왕님을 맞이하는 의미가 큰 것 같고, 그 외에도 바다를 통해 오는 다른 존신(尊神)들을 맞이하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수살맞이굿을 마치고는 마을을 돌아 현재의 우물이나 옛날 우물터들을 찾아 우물굿을 한다. 이를 우물용왕 또는 용왕굿이라고도 하며, 마을 재앙을 없애고 물이 잘 나오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굿이다. 예전에 우물은 이 마을 사람들의 생명과 같은 식수원이었다.
우물굿을 마치고 당에 오르는데, 중간의 길목에서 작은 고사상을 차려놓고 동네 부정과 당굿을 위해 잡인, 잡색들의 부정을 쳐낸다. 이를 거리부정이라고 하는데, 서서 하기 때문에 선부정이라고도 한다. 그리고는 이어서 당굿에 들어가는데, 이처럼 외포리곶창굿은 수살맞이굿, 마을우물굿, 거리부정(선부정), 부정거리(당안굿)를 거쳐 조상거리, 제석거리, 성주거리(성주모심), 장군거리(작두거리), 별상거리, 성주왕신거리, 대감거리, 창부거리, 선주굿, 기내림, 군웅굿, 막뒤놀음, 뒷전으로 이어진다. 외포리곶창굿은 종교적 의례로서 신앙성을 지니지만, 또 여기에서 파생되는 축제성과 시장 활성의 기능성을 함께 지니기도 한다. 특히 외포리 해변에는 어시장을 열고 있어 더 그러하다.

 

<계룡돈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옛날에는 규모가 큰 군사시설을 진이라 하고 작은 것은 돈대라 하였는데,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돈대를 설치해 적군의 침입을 감시하고 직접 싸우기도 했으므로 오늘날의 초소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강화도에는 53개소의 돈대가 남아 있는데, 1679년(숙종 5)에 설치된 것이다.

계룡돈대는 경상도 군위(軍威)의 어영군사(御營軍士)들이 축조한 돈대로, 강화 53돈대 중 유일하게 축조연대가 표시되어 있다. 30m×20m의 직사각형 모양이며, 한 면은 석축 높이 2m 정도에 길이가 30m이고, 3면은 석축(石築)되어 해변을 향해 정면으로 외적을 볼 수 있다. 망월(望月)돈대와 함께 직접 영문(營門)에서 관할했다. 석축 하단에 ‘강희18년 군위어영 축조(康熙十八年軍威禦營築造)’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강희 18년은 1679년이다.

 

<무태돈대>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되었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 해안지역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해안선을 따라 축조한 강화 53돈대 중 하나로, 1679년(숙종 5)에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가 어영군(御營軍) 2,000여 명과 경기·충청·전라 3도 승군(僧軍) 8,000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강화도의 돈대는 53개 중 49개가 병자호란 43년 후인 숙종 5년에 지었다.

조선시대 때, 성곽이나 변방(邊方) 요지에 세워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마련한 초소인 돈대(墩臺)는 주변보다 높은 평지에 쌓는데, 밖은 구릉을 깎아서 높게 하여 적의 침입을 막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하였다.

창후리 선착장 서북쪽 해안으로 돌출한 언덕 위에 직사각형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는 무태돈대는 인화돈대·광암돈대·귀등돈대·작성돈대와 함께 강화의 7보(堡) 5진(鎭) 중 하나인 인화보(寅火堡)의 관리하에 감시소와 방어진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남쪽으로 3,418m 거리에 망월돈대가 있고 북쪽으로 2,313m 거리에 인화돈대로 이어진다.

돈대의 규모는 둘레 210m, 너비 2m로, 성벽은 안팎을 모두 화강암으로 쌓았고 잡석과 흙으로 안을 채웠다. 석축은 지형에 맞추어 쌓아서 경사진 부분이 많다. 현재는 동쪽과 서쪽의 성벽이 잘 남아 있고 남쪽 성벽은 하부는 원형이 남아 있으나 상부는 최근에 새로 쌓았다. 동쪽 성벽에 있는 성문은 남쪽 성벽에서 매우 가까운데, 안팎에 네모 반듯하게 다듬은 무사석(武砂石) 두 단을 쌓고 그 안쪽으로 장대석 석축을 세운 위에 두껍고 긴 천장돌 6개를 덮었다.

성안에는 해안을 향해 대포를 올려놓는 자리인 포좌(砲座)를 4곳 설치하였다. 이 포좌는 현재 서쪽 성벽에 2개, 서북쪽 모서리에 1개 남아 있고 나머지 하나는 서남쪽 모서리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성벽이 허물어져 확인할 수 없다. 남아 있는 3개의 포좌 중에서도 서북에 있는 것은 그 위치만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이다. 돈대 내부는 현재 밭으로 일구어져 있다.

 

 

4.탐방일자

2014.09.06(토)

 

5.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6.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