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 비우당 탐방기

김영도 2012. 11. 15. 23:08

1.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2,교통

전철1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로 나와 이화사거리교통표지판과 낙산공원1.2k 이정표가 있습니다.

서울성곽길을 따라 올라가면 정점에 낙산공원 종합안내도(버스 종점)가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쌍용아파트가 보이고 정문에 있는 비석과 원각사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조금 내려가면 비우당이 있는 초가집이 보입니다.

 

 

3.상세설명

낙산의 동쪽 비탈에 비우당이라는 작은 초가집이 한 채 있다. 비우당(庇雨堂)은 조선의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살던 집으로, 이수광은 이 집에서 '지봉유설'을 지었다고 한다. 비우당은 아주 작은 초가집으로, 조선 사대부의 청빈함을 느낄 수 있다. 본래 비우당은 이수광의 외가 쪽 5대조인 유관이라는 사람이 살던 집이라 한다. 유관은 세종 때 우의정을 지냈던 사람으로 당시 황희, 맹사성과 함께 선초 삼청(鮮初 三淸:조선 초 세 명의 청백리)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그가 죽자 세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흥인지문으로 나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청백리 유관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집 천장에서 비가 줄줄 새자 유관은 방에서 우산을 펴고 지내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산이 없는 집은 비가 오면 어찌 견디겠소?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욕심없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 일화로 당시 이 터에 있던 집을 우산각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이수광의 아버지가 집을 물려받았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이수광이 다시 짓고 비우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비우당(庇雨堂)이란 근근이 비를 가리는 집이란 뜻이다. 이수광 역시 청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사람이라 한다. 이수광이 죽은 후 조선의 선비들은 이수광과 비우당의 청빈함을 배우기 위해 이 집을 찾았다고 한다. 특히 과거 때가 되면 지방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온 선비들이 이 비우당을 찾았다고 한다. 비우당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비우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청계천의 다리 이름이 비우당교라 불리기까지 했다.

 

비우당 뒤에는 자주동샘이라 불리는 작은 샘이 있다. 지금은 물이 끊겨 흔적만 남아 있는데 이 자주동샘이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정순왕후는 15세에 단종과 혼례를 치루고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계유정난으로 단종의 삼촌이 세조가 왕위에 오르고 사육신의 난으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때 정순왕후도 서인으로 강등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는데 이때 정순왕후의 나이 18세였다.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청룡사 부근에 정업원이라는 초가를 짓고 천에 염색을 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한다. 그때 정순왕후가 이 샘에서 빨래를 했는데, 빨래를 하기만 해도 신기하게 자주색으로 염색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 샘을 자주동샘이라 부르고, 이 일대를 자줏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주동샘 옆의 바위에는 한자로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세조는 정순왕후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정업원 부근에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는 집을 지어 주었지만 정순왕후는 끝내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정업원에서 살았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죽은 뒤 60년을 넘게 정업원에서 머물다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4.탐방일자

2011.1.18 화

 

 

5.글쓴이

김영도 010-2888-8041

 

 

6.생생한 장면

 

 

(버스종점인 낙산공원 종합안내도)

 

 

(쌍용아파트 정문의 입석비)

 

 

(비우당 설명서)

 

 

(비우당 이수광의 고택)

 

 


 

 


 

 

(자주동샘의 슬픈전설)

 

 

(자주동샘)

 

 

(자주동샘과 비석)

 

 

(지봉선생 비우당 옛터 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