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직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44

이직(李稷, 1362-1431)은 조선 건국을 돕고 초창기의 기초를 다진 공신으로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세종실록>에 실린 이직의 졸기에 의하면, 호는 형재(亨齋)이고, 본관은 성주로 이조년의 증손자이다. 나이 16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밀직사 우부대언이 되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창업의 3등 공신이 되고, 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서북면 도순문찰리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지의정부사에 올랐다.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이 되고, 명나라에 가서 고명(誥命)을 받고 돌아왔으며, 판사평부사(判司評府事)로서 왕명으로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44살에 이조판서가 되었고, 그 후에 성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우의정이 되어 충녕대군의 세자책봉에 황희와 함께 반대하다가 성주에 유배되었다. 61살(세종4년)에 영의정에 올라 명나라 인종의 등극사로 다녀왔다. 그는 성품이 중후하고 근신하였으며 공신반열에 들어서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따라하며 일을 당해서는 결단력이 모자랐다고 한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조선 창업에 기여하여 현달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을 손 너뿐인가 하노라.

 

 

이 작품은 앞에 나온, 정몽주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작품과 대조되는 정서를 보여준다. 거기서는 권세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까마귀들의 무리에 정결한 백로더러 끼어들지 말라고 권유하였는데, 여기에서는 까마귀도 그 나름의 자아정체성이 있다는 합리화와 항변을 하고 있다. 두 작품이 우화적 기법을 사용한 것이나 서로 대응하는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왕조 교체기에 창작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초장은 까마귀의 겉모습이 검다고 백로더러 웃지 말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까마귀로 표상된 사람들이 겉보기에는 권세를 차지하기 위해 쫓아다니는, 의리를 저버린 무리로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 그들 나름의 정당성이 있다는 것이다. 중장에서 그 점을 분명하게 언명하였다. 겉만 보고 속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종장에서 그보다는 오히려 몸가짐이 정결한 체하며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만을 고집하는 사람들, 곧 백로로 표상된 무리야말로 희망 없는 명분에 사로잡혀 민중의 삶을 모른 체하는 속 검은 자들이라고 역공하였다. 그리하여 자기들은 비록 권세를 쫓는 까마귀들이라고 비난받을지언정 속마음은 순결하여 오로지 민중을 구하기 위하여 역성혁명을 일으켜 새 시대를 열 충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시는 그의 삶에 바탕을 둔 자기 정합성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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