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남이의 시

김영도 2020. 8. 21. 15:29

남이(南怡, 1441-1468)는 세조 때 무공을 세웠으나 예종 때에 모함으로 처형된 무신이다. <세조 예종실록>과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의산군(宜山君) 휘(暉)와 태종의 4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아들이며, 권람(權擥)의 사위이다. 17살(세조3)에 무과에 장원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우대장(右大將)으로 이시애를 토벌하여 1등공신이 되고, 또 서북변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여 27살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예종은 그를 꺼려했다. 예종 즉위 후 대궐에서 숙직하다가 혜성(彗星)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이 깔릴 징조라고 말했는데, 평소에 그의 승진을 시기하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 반역을 꾀한다고 모함하여 처형되었다. 그의 시조 한 수를 보자.

 

 

장검(長劍)을 빼어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대명(大明) 천지(天地)에 성진(腥塵)이 잠겼어라.

언제나 남북풍진(南北風塵)을 헤쳐 볼꼬 하노라.

 

 

이 시조는 그가 27살에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고 건주위를 정벌하여 무공을 세웠을 때에 지었던 작품일 것이다. 왜냐하면 백두산에 올라가 혼란스런 세상을 평안하게 하고 싶다는 큰 포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지었다는 한시에도 "백두산의 돌을 칼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을 말 먹여 없애네. 사나이가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치 못한다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오.(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라고 하여 비슷한 기개를 표현하였다.  이 시조의 초장은 무장(武將)의 씩씩한 기상을 나타낸 것이다. 백두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니 큰 칼을 들고 백두산에 올랐다는 말은 무인의 기상을 최대한으로 표현한 말이다. 실제로 그가 백두산에 올랐는지는 따질 필요가 없다. 중장은 대명천지가 무엇이냐에 문제가 있다. 환하게 밝은 세상이라는 말인지, 명나라를 지칭한 것인지에 따라 사뭇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조 13년에 명나라의 요청으로 변방을 침략하는 건주위의 여진족을 명군과 협력하여 정벌했는데, 이때 이시애의 난을 토벌했던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 등이 함께 출병했던 것으로 보아 후자가 더 현실감이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어야 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 밝은 세상에 티끌이 가득하다는 뜻과 명나라의 변방인 만주 지역에 전운이 감돈다는 뜻이 겹쳐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종장은 남쪽과 북쪽의 전장을 횡행하여 큰 공을 세워보겠다는 큰 포부를 드러낸 것이다. 남북풍진을 헤친다는 것은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고 건주위를 정벌하여 변방을 평안하게 하고 싶은 포부를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변방을 평정하여 공을 세웠던 무장의 씩씩한 기상이 거침없이 표현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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