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홍적의 시

김영도 2020. 8. 19. 22:27

홍적(洪廸, 1549-1591)은 선조 때의 문신이다. <선조실록>과 <국조인물고>에 보면, 자는 태고(太古)이고 호는 양재(養齋) 또는 하의(荷衣)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어려서부터 재명이 있었고 22살에 도산서원으로 이황을 찾아 학문을 물었다. 24살(1572,선조5)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고, 이듬해 홍문록에 뽑히고, 승문원 정자로 사가독서 하였다. 다음해 홍문관 정자가 되고, 저작, 부수찬, 예조․병조좌랑을 거쳐, 32살에 예조정랑이 되고 경기도 어사로 나갔다가 수찬, 교리, 응교가 되었다. 10년간 홍문관에 있어 경학에 밝고 논사(論思)를 잘하여 학사전재(學士全才)라 불렸다. 35살(1583,선조16)에 홍문관에서 이이, 박순, 성혼의 잘못을 탄핵하다가 장연(長淵) 현감으로 좌천되었고 3년 후 병으로 사직했다. 40살에 서용되어 병조정랑, 사인, 집의가 되었고, 40살에 모친상을 당했다가 복이 끝나기 전에 죽었다.

   

 어제 오던 눈이 사제(沙堤)에도 오돗던가.

 눈이 모래 같고 모래도 눈이로다.

 아마도 세상 일이 다 이런가 하노라.

 

이 시조를 언제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래 언덕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황해도 장연 현감으로 나갔을 때 지은 것이 아닌지 추측된다. 왜냐하면 장연에는 몽금포 해변이 있고, 또 자신의 결백을 눈과 모래에 비겨서 풍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장은 모래 언덕에 어제 내린 눈을 객관적 상관물로 제시하였다. 눈은 결백함을 상징한다. 어제 내린 눈이란, 지난날 자신이 홍문관에서 이이(李珥)를 비롯한 서인들이 일처리를 제멋대로 한 것을 탄핵한 것이 공의(公議)에 의한 것이지, 일절 사감(私感)에 의한 것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래 언덕이란 눈과 구별되는 사감이나 당파싸움에서 말미암은 탄핵을 말하는 것이겠다. 중장에는 모래 위에 내린 눈과 모래가 한 빛으로 구별이 되지 않는 상황을 말한 것으로, 자신들의 행위는 사감이나 당파싸움 때문이 아닌데도 그것과 구별되지 못한 채, 지치(至治)를 이룩할 인재를 당파싸움으로 공격했다 하여 왕의 미움을 받고 내쳐졌다는 뜻을 감추고 있다. 자신의 행위는 결코 당쟁이 아니라 결백한 공의(公議)라는 주장이다. 종장에서는 세상일이 다 이렇다는 전칭 판단을 하여, 자신의 결백이 가려지지 못한 채 왕의 노여움을 사서 이렇게 내쳐진 것도 흑백이 명확히 가려지지 않고 뒤섞여 묻혀버리는 모든 세상사와 같다고 체념하였다. 그가 논사(論思)를 잘했다는 것으로 보아 생각이 민첩 정밀하고 논리가 분명했을 것이므로 자신의 행위에는 나름대로 결백함이 있다는 논리를 굽히지 않았을 것이고, 좌천된 곳에서 그런 생각을 심각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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