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조존성의 시

김영도 2020. 8. 19. 22:24

조존성(趙存性, 1553-1627)은 선조․광해․인조 때의 문신이다. <선조․광해․인조실록>과 <국조인물고> 등에 보면, 자는 수초(守初)이고 호는 정곡(鼎谷) 또는 용호(龍湖)이며 본관은 양주다. 20살에 진사가 되어 이항복과 친했으며 성혼과 박지화(朴枝華)에게 배웠다. 38살(1590, 선조23)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대교가 되었으나 정철의 당이라 하여 파면되었다. 임란이 나자 모친을 잃었다가 산곡을 헤매어 찾은 후, 의주로 가서 봉교, 전적,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병부상서 석성(石星)을 만나 철병론(撤兵論)을 거두게 하여 그 공으로 직강이 되었다. 호조정랑을 거쳐 43살에 해운판관이 되어 군량운반에 공을 세웠으며, 봉상첨정(奉常僉正), 내자시정 등을 거쳐, 강화부사를 역임했다. 51살에 성균관 사예, 사성을 거쳐 전라어사로 나갔다가 충주목사가 되었으며, 모친상을 치른 후에 서산군수를 지냈다. 광해군 즉위 후 정언으로 왕의 생모추존을 반대하다가 파직 당했고, 동래부사를 거쳐 60살에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무고로 파직되어 용산에 있다가 폐모론이 일어나자 호서지방으로 내려갔다. 70살에 해운사가 되었고, 인조반정 후, 형조참판, 호조참판, 지의금부사, 동지돈녕부사, 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이괄의 난이 나자 공주로 왕을 호종하였고, 난이 평정된 후 지중추부사 겸 지의금부사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강원도 관찰사, 지돈령부사를 지내고 정묘호란이 나자 호조판서로 세자를 따라 전주에 피란했다 돌아와 병사했다.

 

 아이야 구럭망태 거둬 서산에 날 늦거다.

 밤 지낸 고사리 하마 아니 자랐으랴.

 이 몸이 이 푸새 아니면 조석(朝夕) 어이 지내리.

 

 아이야 되롱 삿갓 찰와 동간(東澗)에 비 지거다.

 기나긴 낚대에 미늘 없는 낚시 매어

 저 고기 놀라지 마라 내 흥겨워 하노라.

 

 아이야 소 먹여 내어 북곽(北郭)에 새 술 먹자.

 대취(大醉)한 얼굴을 달빛에 실어 오니

 어즈버 희황상인(羲皇上人)을 오늘 다시 보아다.

 

 아이야 죽조반(粥早飯) 다오 남묘(南畝)에 일 많아라.

 서투른 따부를 눌 마주 잡으려뇨.

 두어라 성세궁경(聖世躬耕)도 역군은(亦君恩)이시니라.

 

이 작품은 “호아곡(呼兒曲)” 네 수로, 차례대로 ‘서산에서 고사리를 캐다(西山採薇)’, ‘동쪽 계곡에서 고기를 보다(東澗觀魚)’, ‘북쪽 마을에서 취하여 돌아오다(北郭醉歸)’, ‘몸소 남쪽 밭을 갈다(南畝躬耕)’라는 내용을 읊은 것이다. 그는 60살(광해군4, 1612)에 동지사로 중국에 갔다가 왜와 교린(交隣)하라는 칙서를 받아왔다고 해서 이듬해 파직을 당해 용산에 머물고 있다가 다시 폐모론이 일어나자 몸을 피해 보령에 내려가 은거했다. 이 때 이 작품을 지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강호자연에 묻혀 살면서 거기서 느낀 흥취를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각 수의 첫머리가 ‘아이야’로 시작하기 때문에 “호아곡(呼兒曲)”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첫 수는 고사리를 캐 먹고 사는 가난한 전원생활을 그렸다. 초장에서 아이를 불러 서산에 날이 늦어지니 구럭망태를 거두라고 했다. 구럭망태를 챙겨서 서산에 해가 퍼지기 전에 고사리를 캐러 가자는 말이다. 중장에서 밤을 지낸 고사리가 많이 자랐을 것이니 그것을 따자는 것이다. 종장에서 그것으로 조석끼니를 때우는 가난한 생활을 그려놓았다. 둘째 수는 고기의 노는 모양을 보고 즐기는 한가로운 흥취를 표현했다. 초장에서 아이에게 동쪽 골짜기에 비가 떨어지니 도롱이와 삿갓을 챙기라 하고, 중장에서 미늘 없는 낚시로 낚시를 하러 가자는 것인데, 고기를 잡으려는 게 아니라 잡았다가 놓아주고 노는 양을 보자는 것이다. 종장에서 고기더러 놀라지 말라고 하고 자신은 강호자연을 즐기는 흥에 겨웠을 뿐이지 고기를 잡아 배를 채우려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셋째 수는 시골 마을에서 술에 취하여 달빛 속에 돌아오는 태평스런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초장에서 아이에게 소 먹이라 하고, 시인은 북쪽 마을에 가서 술을 먹는다. 중장에는 대취한 얼굴로 달빛 속에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그렸다. 종장에서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옛날 중국의 복희씨(伏羲氏)가 다스리던 태평시절에 살던 사람처럼 세상일을 잊고 편히 사는 사람이 아니냐는 것이다. 강호(江湖)의 취흥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지막 수에는 밭에서 몸소 따비를 잡고 힘들게 일하는 것도 모두 임금의 은혜라고 했다. 초장에서 죽으로 조반을 때우고 남쪽 밭에 나가 일하는 선비의 궁한 처지를 보여준다. 중장에는 서툴게 따비를 잡고 밭을 일구는 모습을 그렸다. 그리하여 종장에서 벼슬에서 물러난 선비가 몸소 따비질을 하는 처지에 떨어진 것을 태평성대라 하고 또 임금의 은혜라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 하에서 몸을 피하여 시골로 은둔한 시인은 강호자연 속에서 생명을 부지하고 사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반어적으로 태평성대의 임금님 은혜라고 말했다. 시절에 거슬리는 말을 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보신책이다. 험난한 시절의 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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