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장현광의 시

김영도 2020. 8. 19. 22:26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은 선조․광해․인조 때의 문신 학자이다. <실록>과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자는 덕회(德晦)이고 호는 여헌(旅軒)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젊어서 학문에 힘써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인정을 받았다. 42살(1595, 선조28)에 재행과 학술로 천거되어 보은현감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했고, 거창현감, 형조좌랑을 거쳐 50살에 의성현령이 되었으나, 성품이 오활하고 관무(官務)에 등한하다는 비난을 받고 그만두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다음에 합천군수, 선공감 첨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70살(1623,인조1)에 성균관 사업,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다음해 장령, 집의, 공조참의,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 후 동부승지, 형조참판, 대사헌, 부호군, 이조참판, 공조판서, 우참찬, 지중추부사 등의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늙고 병들었다고 모두 사양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병자호란이 나자 주군(州郡)에 격문을 보내어 근왕병을 일으켰고, 왕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영천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가 만년을 보냈다. 이이(李珥)의 이기설을 찬동하여 이기(理氣)는 서로 체용(體用)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대 명망 있던 선비로 인조의 부름을 여러 번 받았으나 학문에 전심하여 <역학도설(易學圖說)>, <성리설(性理說)> 등을 썼다.

 

 바위로 집을 삼고 폭포로 술을 빚어

 송풍(松風)이 거문고 되며 조성(鳥聲)이 노래로다.

 아이야 술 부어라 여산동취(與山同醉).

 

이 시는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물러가서 전원에서 생활할 때에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시조의 내용은 자연에 몰입하여 무아일체가 된 경지를 읊고 있다. 초장에는 자연 속에 들어가 자연과 동화된 생활을 표현하였는데, 바위틈이 집이고 폭포수가 술이 된 경지이니 시인은 자연의 일부가 된 것이라고 하겠다. 장현광이 바로 이렇게 바위굴에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이 구절의 뜻은 무엇인가. 임금 인조의 지우(知遇)를 입고 여러 번 벼슬에 불려 나갔으나 자신에게는 벼슬보다는 전원에서 학문하는 것이 맞는 것임을 알고 번번이 사직하였다. 그리하여 초야에 묻혀서 학문하는 생활을 자연에 동화된 삶에다 비겨서 표현한 것이다. 중장에도 자연과 동화된 생활의 또 다른 모습이 표현되었는데, 이번에는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 모두 자연이라고 하였다. 솔바람 소리와 새의 노래 소리가 그의 즐거움이며, 자신은 마치 자연의 일부인양 일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늘어놓은 자연동화의 경지를 종장에서 한마디로 묶었다. 바로 여산동취(與山同醉), 산과 더불어 한가지로 취해서 노닌다는 것이다. 여산동취 다음에 ‘하리라’가 생략된 것은 아마도 후대에 시조창으로 불리면서 그리된 것이다. 이렇게 그는 벼슬을 사양하고 전원에서 학문을 연마하면서 자연과 동화된 즐거움을 시로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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