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조의 시

김영도 2020. 8. 19. 22:30

선조(宣祖, 1552-1608)는 조선의 14대 왕으로 초명은 균(鈞)이고 뒤에 공(昖)으로 바꾸었으며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이다. <선조실록>과 행장을 보면,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16살에 즉위하여 이황․이이 등을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다. 우리나라 선비의 행적을 엮은 <유선록(儒先錄)>을 비롯하여,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을 편찬하여 유학을 장려하고,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을 신원시켰다. 그러나 동서분당으로 시작된 당쟁에 휘말려 국력이 허비된 데다가, 7년간의 왜란으로 온 나라가 황폐화 되었다. 이순신의 활약과 명나라 원병의 구원, 그리고 의병의 활동으로 전란을 극복했지만 조선 건국이후 최대의 국가적 시련을 겪었다. 임란 후에도 당쟁은 격화되었고, 계비 소생 영창대군과 세자인 광해군을 둘러싼 당쟁의 암투 속에서 죽었다. 문학에서는 수많은 인재들이 등장하여 활약한 이른바 목릉성세(穆陵盛世)를 열기도 했다.

 

 오면 가려하고 가면 아니 오네.

 오노라 가노라니 볼 날이 전혀 없네.

 오늘도 가노라 하니 그를 슬퍼하노라. 

 

이 작품은 노진(盧禛, 1518-1578)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갈 때 지은 것이라 하니, 선조가 젊은 군주였을 때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노진은 자주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간 사람이고 선조가 즉위한 후 10년쯤 되던 해에 대사헌을 그만두고 물러갔으니 아마 그 때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임금 곁에 있다가 물러가니 섭섭하여 은쟁반에 이 시조를 써서 중사(中使)를 시켜 보냈다고 하니까 말이다. 젊은 왕은 지치(至治)를 이루어 보려는 포부를 지니고 어진 선비들을 많이 등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벼슬을 버리고 물러가니 안타깝기만 하다.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어 경쟁이 치열해지니 결국 동서분당으로 나아간 것이다. 왕이 이를 조정하고 힘을 모아 매진할 수 있도록 미래지향적이 돼야 하는데 그런 조정과 통솔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기에 소모적이고 지위 쟁탈적인 논쟁이 격화된 것이다. 그리하여 분쟁의 소용돌이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선비들을 날마다 보자 왕도 힘이 빠져서 서글픈 마음을 토로하게 되었다. 평이하고 담담한 말 속에 신하를 보내는 아쉬움이 배어있다.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제의 시  (0) 2020.08.19
김장생의 시  (0) 2020.08.19
곽기수의 시  (0) 2020.08.19
홍적의 시  (0) 2020.08.19
장현광의 시  (0) 2020.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