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항복의 시

김영도 2020. 8. 19. 22:21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이다. <선조실록>과 <광해군일기>,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등에 따르면, 자는 자상(子常)이고 호는 백사(白沙)이며 본관은 경주다. 어려서부터 의를 좋아하고 남을 도우려 하였다. 25살(선조13년, 1580)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전적, 정언, 수찬 등을 거쳐, 34살에 이조정랑, 예조정랑이 되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밝고 민첩하게 왕명을 받들었다. 응교, 직제학, 호조참의,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나자 왕을 의주로 호종했다. 이조참판, 형․병조판서, 도총관, 대사헌을 거쳐 다시 병조판서가 되었고,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구원을 청하자고 주장하며 근왕병을 모집했다. 이덕형이 청원사로 가서 명군이 파견되자 원접사가 되었다. 40살에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 지의금부사, 우참찬을 역임했으며, 임란 중 다섯 번 병조판서를 맡아 크게 활약했다. 44살에 좌의정, 다음해 우의정이 되고, 도원수, 도체찰사를 겸하였으며,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47살에 오성(鰲城)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성혼(成渾)을 구하려다가 정철(鄭澈)의 당이라는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49살에 호성(扈聖)공신 1등에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 후에 좌의정, 우의정이 되었으나, 박응서(朴應犀) 사건에 연좌된 정협(鄭浹)을 천거했다는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62살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북청에 유배되어 죽었다. 자질이 활달하고 도량이 컸으며 농담을 잘했다. 임란 중에 국가에 기여한 바가 컸다.

 

 강호(江湖)에 기약(期約)을 두고 십년을 분주하니

 그 모른 백구(白鷗)는 더디 온다 하건마는

 성은(聖恩)이 지중(至重)하시니 갚고 가려 하노라.

 

 꽃아 색(色)을 믿고 오는 나비 금(禁)치 마라

 춘광(春光)이 덧없는 줄 넨들 아니 짐작하랴

 녹엽(綠葉)이 성음자만지(成陰子滿枝)하면 어느 나비 돌아오리.

 

이 두 작품은 시인이 젊었을 적에 지은 작품인 듯하다. ‘십년을 분주하니’라는 말이나 꽃더러 오는 나비를 거절치 말라는 말로 보아 벼슬에 나선 지 십년 정도 지났으며 아직 젊음이 남아 있는 때와 관련지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첫 수는 강호(江湖)를 그리워하지만 벼슬길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한 마음을 읊은 것이며, 둘째 수는 꽃과 나비를 빌어서 여인더러 다가오는 남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여 기생을 희롱한 듯한 노래다. 첫 수의 초장에는 언젠가 전원으로 돌아갈 마음으로 십년 동안 벼슬길에 종사했다고 했다. 그는 서울 출신이지만 본디 산수를 좋아하여 날이 좋으면 자질(子姪)을 데리고 삼각산 중흥동에 가 놀다오곤 했으며, 58살에 박응서 사건으로 정승에서 물러난 후, 동대문 밖 노원(蘆原)으로 거처를 옮기고 청평산 등지로 유람한 것을 보면 젊어서부터 전원으로 돌아갈 마음이 있었다. 중장에는 그런 자신의 속을 모르는 흰 갈매기는 더디 옴을 탓한다고 했다.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자신의 또 다른 내면을 흰 갈매기 곧 자연이 재촉한다고 대유한 것이다. 종장에서 자신이 지금 당장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유인즉 임금의 은혜가 너무 두터워서 그것을 갚고 나서 가겠다고 하였다. 벼슬길에 대한 미련이기도 하고 벼슬하는 명분이기도 하다. 사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에 왕명을 신속하고 깔끔하게 처리하는 행정능력과 승지를 맡아 왕명을 지성으로 받드는 모습을 보고 선조는 그를 신임했으며, 임란 중 어려운 시절에 그에게 대임을 여러 번 맡겼던 것을 보아서도 이 말이 허튼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둘째 수는 꽃을 불러서 꽃으로 대유된 여인에게 충고하는 어조를 띠고 있다. 초장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지금의 상태만 믿고 오는 나비를 금하지 말라고 한다. 중장에서 봄빛이란 덧없는 것인 줄 알 것이라고 전제하고, 종장에서 푸른 잎이 돋아나 녹음이 짙어지고 가지에 열매가 가득 맺히면 그때 가서는 아무리 원해도 나비는 찾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봄철을 맞아 곱게 핀 꽃더러 즐거이 나비를 맞아들이라는 이 말은 아마도 기생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그는 본디 해학을 좋아하는 성품이었으므로 이런 말을 했음 직하다.

       

 귀먹은 소경이 되어 산중에 들었으니

 들은 일 없거든 본 일이 있을소냐

 입이야 성하다마는 무슨 말을 하리오.

 

 시절(時節)도 저러하니 인사(人事)도 이러하다

 이러하거니 어이 저러 아닐소냐

 이런자 저런자 하니 한숨 겨워하노라.

 

 장사왕(長沙王) 가태부(賈太傅)야 눈물도 여릴시고

 한문제(漢文帝) 승평시(昇平時)에 통곡은 무슨 일고

 우리도 그런 때 만났으니 어이 울꼬 하노라.

 

이 시들은 선조 말 이후 북인이 득세하여 정국이 복잡해지고 광해 5년에 그도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그 동안에 지은 작품일 것이다. 자신을 ‘귀먹은 소경’에 비유하거나, 시절과 인사가 개탄스럽다고 하고, 한나라 가의(賈誼)가 억울함을 당하던 때와 갔다고 했기 때문이다. 세 수 모두 당시의 정국을 한탄하는 심정을 담고 있는 풍유시라고 할 것이다. 당시는 광해군이 즉위하여 소북(小北)인 유영경을 몰아내 죽이고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大北)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던 때였다. 이들의 주장에 따라 왕위를 노리는 임해군을 죽이려 하자 이항복은 이덕형 등과 함께 형제의 도리를 내세워 이를 말리다가 역적을 비호한다는 누명을 쓰기도 했다. 칠서(七庶)의 옥이 일어나자 그가 도체찰사로 있을 때 추천한 정협(鄭浹)이란 자가 이들과 결탁하였으므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영창대군이 살해되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그것을 극력 반대하다가 북청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의 세 작품이 쓰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첫 번째 작품은 흥(興)의 수법으로 일종의 풍유다. 귀먹은 소경이 산중에서 보고들은 일이 없어서 할 말이 없다는 것인데, 험악한 정국에 대하여 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극도의 보신책이요 숨겨진 한탄이다. 그는 여러 번 벼슬을 사양하고 파주 농장이나 동대문 밖 노원, 망우리 등지로 물러났으나 다시 불려나오곤 했다. 실권 없는 정승이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두 번째 작품은 시절과 인사(人事)의 어지러움을 한탄한 것이다. 시절이 저렇게 어수선하니 사람의 일도 또한 이렇게 어지럽다. 이렇게 어지러우니 어떻게 저리 어수선하지 않겠느냐. 이렇다 거니 저렇다 거니 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고 하였다. 연쇄법으로 말이 꼬리를 물게 하였는데, 요컨대 정국의 난맥상과 사람들의 어지러운 일처리를 두고 탄식한 내용이다. 세 번째 작품은 한나라 문제(文帝) 때 장사왕의 태부(太傅)였던 가의(賈誼)가 당시의 시국이 통곡할 지경이라고 한 고사를 들어 광해군 당시의 시국도 그러하다는 통탄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한나라 문제는 선정을 베풀어서 나이 어린 가의의 개혁정책을 받아들였지만, 공신들과 제후들의 반발로 가의를 장사왕의 스승으로 내치게 되었고 자신의 포부를 펴지 못하고 중도에서 꺾인 가의는 시국의 통탄할 일들을 지적하여 상소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이 바로 광해군 당시에 대북(大北)의 정인홍, 이이첨 등이 세력을 잡아 여러 가지 불의한 일들을 저지른 것을 두고 통탄해 하는 자신의 경우와 유사하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세 작품 모두 어지러운 시국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철령(鐵嶺) 높은 봉(峯)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 볼까 하노라.

 

이 작품은 그가 62살(광해9, 1617) 12월에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가면서 함남 안변에서 지은 시조라 한다. 후에 광해군이 궁인이 부르는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탄식했다고 한다.

임금을 바르게 이끌려는 늙은 신하의 충정이 어려 있는 작품이다. 초장은 배경을 묘사하면서 거기에다 자신의 정서를 투사하고 있다. 철령 높은 봉은 배경이면서 임금과의 단절을 함축한다. 구름은 실제 사물이면서 자신의 심정을 실어가서 비를 뿌려줄 심부름꾼으로 그의 정서가 투사된 상관물이다. 중장과 종장은 구름에게 시키는 부탁이다. 임금을 이별하고 귀양지로 가는 신하의 원통한 눈물을 비 삼아 띄우라는 말은 물의 변환 이미지를 활용한 은유다. 눈물은 구름이 되고 구름은 다시 비가 된다는 물의 변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비가 된 눈물은 종장에서 님 계신 구중심처 곧 대궐에 뿌려져서 임금에게 전해지라는 간절한 소망이다. 무엇을 소망하는 것인가. 자신의 충심(衷心)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그의 충심은 무엇이었을까. 광해군이 왕권의 강화를 위해 대북(大北)의 주장을 빌어서 형 임해군과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모후 인목대비를 폐하는 불륜을 그만두라는 것이다. 화해와 상생의 정치를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을 보탰던 늙은 신하의 소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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