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박인로의 시조 2

김영도 2020. 8. 18. 22:53

 

 신농씨(神農氏) 모른 약(藥)을 이 초정(椒井)에 숨겼던가.

 추양(秋陽)이 쬐오는데 물 속에 잠겼으니

 증점(曾點)의 욕기(浴沂) 기상(氣像)을 오늘 다시 본 듯하다.

 

 홍진(紅塵)에 뜻이 없어 사문(斯文)을 일을 삼아

 계왕개래(繼往開來)하여 오도(吾道)를 밝히시니

 천재후(千載後) 회암선생(晦菴先生)을 다시 본 듯하여라.

 

그가 57살 이후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교유하면서 유람했는데, 이 시조는 61살 되던 해 가을에 울산의 초정(椒井)에 함께 가 목욕하면서 지은 작품이다. 첫 수는 온천욕(溫泉浴)하는 기분을 읊은 것이고 둘째 수는 주자학에 전념하는 정구(鄭逑)를 찬양한 것이다. 첫 수의 초장에서 고대 농경과 약초의 신인 신농씨(神農氏)도 모르는 약을 울산의 초정에다가 숨겼느냐고 물어서 초정의 효력을 강조하고, 중장에는 가을볕을 쬐면서 목욕하는 장면을 제시했다. 종장에서 이렇게 목욕하는 기분이 마치 <논어> 선진편(先進篇)에 나오는 증석(曾晳)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며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겠다고 한 기상과 같다고 하여 그들이 함께 명리를 잊고 유유자적하는 즐거움을 드러내었다. 둘째 수의 초장은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게 된 것을 말하고, 중장은 한강이 주자학을 계승하여 새로운 경지를 열어감을 말한 것이다. 종장은 자신보다 18살 위인 한강이 마치 주자를 본 듯이 존경스럽다는 말이다. 그가 한강을 모시고 교유하면서 인격과 학문의 감화를 받고 이렇게 칭송하는 시를 지었을 것이다. 

 

 무정(無情)히 섰는 바위 유정(有情)하여 보이나다.

 최령(最靈)한 오인(吾人)도 직립불의(直立不倚) 어렵거늘

 만고(萬古)에 곧게 선 저 얼굴이 고칠 적이 없나다.

 

 탁연직립(卓然直立)하니 법(法)받음 직하다마는

 구름 깊은 골에 알 이 있어 찾아오랴.

 이제나 광야(廣野)에 옮아 모두 보게 하여라.

  

 계구대(戒懼臺) 올라오니 문득 절로 전긍(戰兢)하다.

 대상(臺上)에 살펴보니 이같이 저허커든

 못 보고 못 듣는 땅이야 아니 삼가 어찌하리.

  

 낚대를 비끼 쥐고 조월탄(釣月灘) 바로 내려

 붉은 여뀌 헤쳐내고 달 아래 앉았으니

 아무리 동강흥미(桐江興味)인들 부럴 줄이 있으랴.

  

 격진령(隔塵嶺) 하 높으니 홍진(紅塵)이 멀어 간다.

 가뜩이 먹은 귀 씻을수록 먹어가니

 산 밖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듣도 보도 못하도다.

 

 강상산(江上山) 내린 끝에 솔 아래 넓은 돌에

 취람(翠嵐) 단하(丹霞)가 첩첩히 둘렀으니

 어즈버 운무병풍(雲霧屛風)을 갓 그린 듯하여라.

 

‘입암29곡(立岩二十九曲)’에서 6수를 뽑았다. 이 작품은 그가 69살 때 영천 입암에 사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을 찾아 종유하면서 여헌의 명에 따라 지은 노래로, 선바위[立岩] 주변의 경치와 거기에 연관시킨 유교적 의미, 그리고 전원생활의 운치를 읊어낸 것이다. 제목은 순서대로 입암(1,立岩), 문암(5, 問岩), 계구대(13, 戒懼臺), 조월탄(24, 釣月灘), 격진령(28, 隔塵嶺), 화리대(29, 畫裡臺)다.

인용한 첫 수는 선바위[立岩]의 곧게 서서 의지하지 않는 자세를 찬양한 것이다. 초장은 무정물(無情物)을 유정물(有情物)로 느끼는 감정투입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리하여 중장에는 인간과 바위를 대비시켜 직립불의(直立不倚)가 어려운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도 바위는 만고에 곧게 서서 의지하지 않으니 인간도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둘째 수는 선바위에게 묻는다는 제목을 붙였는데, 선바위의 탁연직립(卓然直立)한 모습을 여러 사람에게 두루 보이고 싶은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이는 여헌 장현광의 빼어난 학문과 인품을 우뚝 선 바위에 비유하고 그의 학덕을 여러 사람에게 본받게 하고 싶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셋째 수는 계구대(戒懼臺)라는 바위 벼랑에 올라서서 그 위태로움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말하고, 세상살이도 다 보고 들어서 꿰뚫어 알 수는 없는 것이니 마치 바위 벼랑인 것처럼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세 수는 자연물을 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교훈으로 삼을 것을 읊었다.   

넷째 수는 조월탄(釣月灘)에서 낚시하는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다. 초중장에서는 달빛 아래 여울 가에 앉아 낚시하는 흥취를 그려내고, 종장에서는 후한(後漢)의 엄광(嚴光, 子陵)이 광무제(光武帝)가 내린 간의대부의 벼슬을 마다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숨어살며 동강(桐江)에 낚시질했던 그 흥취가 부럽지 않다고 하였다. 전원에 숨어 살며 즐기는 강호의 흥취가 더할 나위없다는 것이다. 다섯째 수는 세속과 인연을 끊었다는 이름의 격진령(隔塵嶺)에 올라 홍진 세상의 시비를 잊어버리고 귀먹은 체, 눈 먼 체 살아가는 은자(隱者)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 마지막 수는 강상산(江上山) 기슭의 경치를 묘사한 것인데, 소나무 아래 넓은 돌과 푸른 안개, 붉은 노을이 어우러져서 마치 운무병풍(雲霧屛風)을 둘러친 것 같다고 하였다. 이렇게 나머지 세 수는 전원에 숨어사는 즐거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것이다.

       

 아비는 낳으시고 어미는 기르시니

 호천망극(昊天罔極)이라 갚을 길이 어려우니

 대순(大舜)의 종신성효(終身誠孝)도 못다 한가 하노라.

 

 심산(深山)에 밤이 드니 북풍(北風)이 더욱 차다.

 옥루고처(玉樓高處)에도 이 바람 부는게오.

 간밤에 추우신가 북두(北斗) 비겨 바라노라.

 

 남으로 삼긴 것이 부부같이 중할런가.

 사람의 백복(百福)이 부부에 갖았거든

 이리 중한 사이에 아니 화(和)코 어찌하리.

 

 동기(同氣)로 세 몸 되어 한 몸같이 지내다가

 두 아운 어디 가서 돌아올 줄 모르는고.

 날마다 석양문외(夕陽門外)에 한숨 겨워 하노라.

 

 벗을 사귈진댄 유신(有信)케 사귀리라.

 신(信) 없이 사귀며 공경(恭敬) 없이 지낼소냐.

 일생(一生)에 구이경지(久而敬之)를 시종(始終) 없게 하오리라.

 

 자세히 살펴보면 뉘 아니 감격하리

 문자(文字)는 졸(拙)하되 성경(誠敬)을 새겼으니

 진실로 숙독상미(熟讀詳味)하면 불무일조(不無一助) 하리라.

 

이 작품은 그가 76살이던 만년에 지은 ‘오륜가(五倫歌)’다. 자신이 가난 속에서도 오로지 실천궁행했던 유교적 가치규범을 전통 양식에 따라 표현한 것이다. 각 수의 제목은 차례대로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형제유애(兄弟有愛), 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 맹자의 오륜(五倫)에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인데 여기서는 형제유애(兄弟有愛)로 하였다. 마지막 수는 총론이다. 각 제목 마다 다섯 수씩이지만 붕우유신은 2수만 전하고, 총론은 3수이다. 그 중에서 각각 한 수씩만 뽑았다.

첫 수에는 <소학(小學)>에서 말한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그 은혜를 갚고자 하나 하늘같아서 끝이 없네.’ (父生我身 母鞠吾身 欲報其德 昊天罔極)라는 말을 나열하고 순(舜) 임금의 효도를 예시하였다. 둘째 수는 자신의 처지에도 임금에 대한 충성은 변함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초장에서 북풍이 부는 깊은 산의 밤은 궁벽한 산골에 숨어사는 자신의 처지를 말한 것이다. 중장에서 임금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이런 곳에서도 백성된 그로서는 유교의 가르침대로 임금이 계신 옥루고처를 염려한다. 그리하여 종장에서 북두(北斗) 곧 임금과 왕권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에 뛰어들었던 충의(忠義)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셋째 수는 부부가 인간생활의 출발점이므로 서로 화락할 것을 강조한다. 비록 남으로 만났지만 부부가 있어야 부자가 생겨나고 가정이 있어야 사회와 국가가 성립되는 만큼, 인간의 모든 행복은 부부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부부는 인간생활의 근원이라고 한 것이다. 넷째 수는 자신의 세 형제가 우애롭게 지내다가 지금은 혼자 살아남아 탄식하는 정경을 그려서 형제가 우애할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섯째 수는 벗을 사귈 때는 신의와 공경으로 오래 변함없이 사귈 것을 권장한 것이다. 마지막 수는 자신이 이 작품을 지은 까닭을 밝혀놓은 것으로 인륜도덕을 강조한 이 노래를 읽고 느껴서 삶의 지표로 삼으라는 권고다. 전란의 혼란상으로 무너져가는 가치규범을 다시 바로잡으려는 그의 간절한 노력이 이 작품으로 제시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시조는 또한 조선 후기로 갈수록 경직화되어 가는 가치규범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시조가 관념적 가치의 메마른 방출구가 될 수 있다는 위험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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