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박인로의 시조1

김영도 2020. 8. 18. 22:55

박인로(朴仁老, 1561-1642)는 선조․광해․인조 때의 무신이자 시인이다. <노계집(蘆溪集)>의 행장(行狀)에 의하면, 자는 덕옹(德翁)이고 호는 노계(蘆溪) 또는 무하옹(無何翁)이며 본관은 밀양으로 경북 영천 출신이다. 어려서 시명(詩名)이 있었고, 32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천의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별시위(別侍衛)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이듬해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 그 막하로 활약하였다. 왜군이 물러간 후 ‘태평사(太平詞)’를 지어 사졸을 위로하였다. 39살(1599)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선전관 등을 거쳐 조라포(助羅浦) 수군만호가 되어 전후의 피폐함을 수습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51살에 무관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돌아가, 충효성경(忠孝誠敬)을 좌우명으로 학문에 전심하고 시작(詩作)에 몰두하여 많은 걸작을 남겼다. 70살에 노인직(老人職)으로 용양위 부호군을 받았다. 41살에 시조 ‘조홍시가(早紅柹歌)’ 등을 지었고, 45살에 가사 ‘선상탄(船上嘆)’을 지었다. 51살에 이덕형(李德馨)을 찾아 ‘사제곡(莎堤曲)’, ‘누항사(陋巷詞)’를 지었고, 57살 이후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교유하면서 가사 ‘소유정가(小有亭歌)’와 시조 여러 편을 지었으며, 이언적(李彦迪)의 도학을 흠모하여 ‘독락당(獨樂堂)’을 지었다. 69살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찾아 시조 ‘입암29곡(立岩29曲)’과 가사 ‘입암별곡’을 지었고, 75살에 ‘영남가(嶺南歌)’, 이듬해 ‘노계가(蘆溪歌)’와 시조 ‘오륜가’를 지었다. 그는 도학적 자세와 조국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질박 웅혼하고 남성적인 기백과 실천궁행하는 선비의 정신을 담은 작품을 썼으며, 정철을 이어 가사문학을 발전시켰다.

 

 반중(盤中) 조홍(早紅) 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음 즉하다마는

 품어 가 반길 이 없을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왕상(王祥)의 잉어 잡고 맹종(孟宗)의 죽순 꺾어

 검던 머리 희도록 노래자(老萊子)의 옷을 입고

 일생에 양지성효(養志誠孝)를 증자(曾子)같이 하리이다.

 

 만균(萬鈞)을 늘여 내어 길게길게 노를 꼬아

 구만리(九萬里) 장천(長天)에 가는 해를 잡아매어

 북당(北堂)에 학발쌍친(鶴髮雙親)을 더디 늙게 하리라.

 

 군봉(群鳳) 모이신 데 외 까마귀 들어오니

 백옥(白玉) 쌓인 곳에 돌 하나 같다마는

 봉황(鳳凰)도 비조(飛鳥)와 유(類)시니 뫼서 논들 어떠하리.  

 

위의 네 수는 대개 40대에 지은 작품으로 한음 이덕형과 교유할 때에 지은 작품인 듯하다. 첫째 수는 이른바 ‘조홍시가(早紅柹歌)’로 41살(1601,선조34) 때 도체찰사 이덕형이 그에게 홍시를 주면서 시조를 짓게 해서 지은 작품이라 한다. 둘째와 셋째 작품도 그 때 함께 지은 것으로 세 작품 모두 어버이를 생각하는 지극한 효성을 드러낸 것이다. 마지막 작품은 이덕형의 손자 이윤문(李允文)이 영천군수가 되어 박인로의 손자 박진선(朴進善)을 만나 조부의 교유를 회상하고 ‘사제곡’, ‘누항사’와 시조 네 수를 목판에 새겨 전하게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시조도 이덕형과 교유할 때에 지은 작품일 것이다.

첫 수는 중국 삼국시대 육적(陸績)의 회귤고사(懷橘故事)를 생각하여 부모가 이미 돌아가고 계시지 않음을 슬퍼한다는 내용이다. 육적이 6살 때 원술(袁術)에게 불려갔는데 귤을 대접받고 3개를 품에 넣으니 원술이 왜 그러냐고 묻자 어머니에게 드릴 것이라 했다고 한다. 박인로도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 주씨를 모시는 데 정성을 다했다고 하는데 아마 이때 그의 모친은 돌아가신 후인 듯하다. 초장은 사물의 제시, 중장은 상관된 고사 인용, 종장은 자신의 정감 토로로 짜임새 있게 구성되었다. 특히 중장에서 보여주는 변형된 인용은 솜씨가 탁월하다고 하겠다. 둘째 수는 초장에서 겨울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은 왕상(王祥)과 눈 속에서 죽순을 얻어 부모를 봉양한 맹종(孟宗)의 효도를 들고, 중장에서 나이 70에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해 색동옷을 입고 춤추고 재롱을 부렸다는 노래자(老萊子)의 고사를 든 다음에, 종장에서 부모님의 마음을 즐겁고 평안하게 모셨다는 증자의 효도를 실천하겠다고 하였는데, ‘품어 가 반길 이 없다’던 앞의 시조와 내용이 어긋나므로 남에게 권유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셋째 수에서는 삼십만 근이나 되는 쇠를 녹여 늘여서 노끈을 만들어 하늘의 해를 잡아매어 북쪽 집에 계신 늙은 부모를 더 늙지 않게 하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하였다. 북당은 어머니를 지칭하는데 뒤에는 학발쌍친이라 하였고, 또 이 작품 역시 첫째 수와 달리 부모님이 살아계신 것으로 읊었으니 서로 맞지 않는다. 남에게 효도를 권유하는 뜻인가. 마지막 수는 효도와는 관계가 없고, 문관이 교유하는 자리에 무관인 자신이 끼이게 된 상황을 재치있게 표현해서 함께 어울려 보자는 뜻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상대를 군봉이니 백옥이니 해서 높이고 자신을 외 까마귀니 돌 하나라고 해서 뭇 사람 속에 합석하게 된 자신을 최대한 낮추었다가 종장에서 결국은 다 같은 유(類)라면서 함께 놀자고 하는 억양의 기법이 재미있게 구사되었다.

 

 어화 아이들아 후려치고 가자스라.

 전원(田園)이 비었거니 어찌 아니 가로소냐.

 도천상(道川上) 명월청풍(明月淸風)이 날 기다리기 오래니라.

 

 상로(霜露) 기강(旣降)하니 밝기도 처창(悽愴)고야

 이 옷이 엷다 하여 추위 저허 그러하랴

 일생(一生)에 영모방촌(永慕方寸)이 문득 느껴 하노라.

 

 반가울사 오늘 꿈에 수양은사(首陽隱士) 보안지고

 정색추연(正色愀然)하고 나더러 하는 말씀

 지금에 고마(叩馬)하던 충의(忠義)를 못내 잊어 하더라.

 

 명경(明鏡)에 티 끼거든 값 주고 닦을 줄

 아이 어른 없이 다 미쳐 알건마는

 값없이 닦을 명덕(明德)을 닦을 줄을 모르나다.

 

 구인산(九仞山) 긴 솔 베어 제세주(濟世舟)를 무어내어

 길 잃은 행인을 다 건네려 하였더니

 사공도 무상(無狀)하여 모강두(暮江頭)에 버렸나다.

 

이 시조들은 그가 무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주자학에 전념했던 시절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들이다. 첫 수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귀거래(歸去來)의 심정을 읊은 것으로 제목은 ‘노주유거(蘆洲幽居)’이고, 둘째 수는 돌아가신 어버이를 사모하여 지은 것으로 ‘사친(思親)’이다. 셋째 수는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충의를 추모한 것으로 ‘모현(慕賢)’ 두 수 중 첫 번째 수다. 네 다섯째 수는 유교적 자기수양을 강조한 ‘자경(自警)’ 세 수중 첫째와 셋째 수다.  

첫 수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에 참가했다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무과를 치르고 조라포 만호까지 지냈던 20년간의 무관 생활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단호한 결심이 엿보인다. 초장은 아이들을 불러 이제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가자는 결단을 드러낸 것이고, 중장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첫 구절인 ‘돌아가자, 전원이 장차 묵어가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歸去來兮 田園將蕪 胡不歸)’를 조금 변형하여 쓴 것이다. 종장에는 고향 영천의 도천마을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려는 것이 도연명이 ‘귀거래사’에서 노래한 심정과 같다는 것을 표현했다. 둘째 수는 가을이 되어 돌아가신 어버이를 생각하는 효자의 마음을 읊은 것이다. 초장에서 서리와 이슬이 내린 가을밤이 처절하고 슬프다고 하고, 중장에서 그 처창함은 옷이 얇아 추위를 느껴서 그런 게 아니라고 하였다. 그것은 평생토록 부모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의 어버이 사랑하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셋째 수는 선현을 추모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꿈에 백이숙제를 만나서 그들의 충절을 새삼 절감했다는 것이다. 그는 꿈에 주공(周公)을 만나 성경충효(誠敬忠孝) 네 글자를 받았다고 ‘몽견주공기(夢見周公記)’에 썼던 만큼 꿈에서까지 선현을 만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초장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紂)왕을 칠 때 제후가 천자를 칠 수는 없다며 말고삐를 잡고 말리다가 수양산에 숨어서 일생을 마친 백이숙제 형제를 꿈에 만났다는 말이고, 중장과 종장은 그들의 충의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고집스럽게 유교적 가치를 따르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수는 거울에 때가 묻으면 모두들 닦아내지만 마음을 수양해서 명덕(明德)을 닦을 줄은 모른다고 탄식한 것이다. <대학(大學)>에 명덕을 밝히려면 ‘사물을 살펴보고 앎에 이르며 뜻을 성실하게 하여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아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마음을 수양할 줄 모른다고 탄식하고 자신은 이 심성수양의 과업에 정진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늦게 다시 시작한 성리학 공부에 전심하고자 하였다. 다섯째 수는 구인산(九仞山)으로 상징되는 유교적 자기완성의 진리를 자신이 변변찮아서 남들에게 일러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드러낸 것이다. 초중장에서 구인산의 긴 솔을 베어서 배를 만들어 세상 사람들을 건너게 한다는 것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교적 자기수양 과정을 남들에게 권하여 모두들 유교적 진리로 이끈다는 뜻이고, 종장에서 사공이 변변치 않아서 그 배를 저무는 강가에 버려두었다는 말은 유교의 가르침을 깨우친 사람들이 민중을 이끌지 않고 있다는 탄식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피폐한 민중의 정신을 유교적 가치관으로 다시 다잡아야 한다는 결의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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