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강복중의 시

김영도 2020. 8. 18. 22:49

강복중(姜復中, 1563-1639)은 선조․광해․인조 때의 향반으로 시인이다. <청계별집(淸溪別集)>과 <청계공유사(淸溪公遺事)>, 서영택(徐榮澤)이 쓴 ‘묘지명’ 등에 의하면, 그의 자는 재기(載起)이고 호는 청계(淸溪)이며 본관은 진주(晉州)로 강맹경(姜孟卿)의 후손이다. 충남 은진 장지리에서 나서, 12살에 고조 강응정(姜應貞)의 묘를 투장(偸葬) 당하는 산변(山變)이 일어나 29살(1591)에 이웃 니산현(尼山縣) 화곡리로 이사했다. 39살에 집에 화재가 났으나 선행으로 천거되어 참봉 벼슬을 받았다. 40살에 은진으로 돌아와 자제들을 모아 교육하였고, 계축옥사(1613, 광해5) 이후에는 서양갑(徐羊甲)의 아우 용갑(龍甲)이 귀양 가자 돌봐주기도 했다. 61살 인조반정 후 이귀와 김류를 방문했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노쇠하여 싸우지 못하는 회포를 가사 ‘위군위친통곡가(爲君爲親痛哭歌)’로 표현했다. 72살에 송강의 ‘훈민가’를 읽고 ‘화답가’ 2수를 썼으며, 충청감사 이안눌(李安訥)이 그의 산송(山訟)을 해결해 주자 감격하여 가사 ‘선산회복사은가’를 지었다. 75살에 외아들을 잃었고 이듬해에는 시조 ‘수월정청흥가(水月亭淸興歌)’ 21수를 지었으며 ‘무인원조가(戊寅元朝歌)’를 지었다. 연안 이씨 산소 관계로 이귀, 이정귀(李廷龜) 등과 교류가 있었고, 산송해결을 위해 이안눌을 방문했으며 서익(徐益), 서양갑 부자와도 교유가 있었다. 강학년(姜鶴年)과는 동족으로 교유하였다.

 

 손자 아홉 아니면은 이 몸이 번듯 죽어

 애고애고 하며 이 근심 내 알더냐.

 들어라 대산(臺山)에 서당(書堂) 짓고 오륜교훈(五倫敎訓) 하리라. 

 

 갈마산(葛麻山) 노송학(老松鶴)이 장망(張網)에 버믈어서

 김명재(金明宰) 비수검(匕首劍)에 아니 죽고 살아났네.

 아무리 해삼면탕덕(解三面湯德)인들 긔나 이나 다르랴.

 

 춘풍(春風)에 봄새 울고 버들에 새 실 난다.

 무매독자(無妹獨子)는 어드러로 갔돗던고.

 세상의 철천(徹天)은 나뿐인가 하노라.

 

 아비 조변후(遭變後)에 조종기물(祖宗器物) 어디 간고.

 선량(善良) 자손(子孫)이 다 유리(流離)하였네다.

 영감(令監)이 십년상인(十年霜刃)으로 태평회복(太平恢復) 하소서.

 

 춘풍(春風)이 건듯 불어 도임(到任) 기별 잠깐 듣고

 만중운산(萬重雲山)을 허위허위 너머 오니

 어즈버 칠년(七年)의 시우(時雨) 본 듯하예다.

 

그의 시조는 심재완(沈載完)의 <시조대전(時調大全)>에 모두 69편이 전하는데, 대체로 자신의 신변에 관한 것과 지인(知人)과 교유에 관한 것, 국가와 조정에 관한 것, 그리고 전원생활에 관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위에 인용한 다섯 수는 자신의 신변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첫 수는 ‘청계통곡육조곡(淸溪慟哭六條曲)’으로 40살(1602)에 은진에서 서당을 연 사실을 읊고 있다. 손자 아홉과 식구들의 생계를 위하여 은진의 대산 아래에 서당을 열어 자제들을 모아 교육했다는 것이다. 둘째 수는 ‘천운순환칠조가 계해반정가(天運循環七條歌 癸亥反正歌)’에 들어있는 것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에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내용은 산송(山訟)의 내막을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갈마산 노송에 깃든 학으로 상징된 자신이 김명재(金明宰)가 친 계략에 걸려서 죽을 지경이 됐다가 인조반정으로 인해 탕왕의 덕택을 입어 풀려난 듯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셋째 수는 그가 75살에 외아들을 잃은 슬픔을 읊고 있다. 봄날이 돌아와 새싹이 나고 새가 지저귀는데 외아들은 어디로 갔느냐고 자식 잃은 아버지의 깊은 슬픔을 토로하였다. 넷째 수는 ‘판관화답가(判官和答歌)’ 중의 하나로 72살(1635)에 이안눌(李安訥)이 공홍도(公洪道) 감사로 산송(山訟)을 해결해 준 것을 고마워하여 그간 사정을 읊은 것이다. 산송이 일어난 후 살림은 파탄 나고 일가자손들은 흩어졌는데, 이 원통한 일을 감사가 판관이 되어 해결해 달라고 하였다. 마지막 수는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진산(珍山) 군수로 온 팔촌(八寸) 형제에게 산송해결을 부탁하러 갔던 일을 읊은 것이다. 팔촌 형제가 이웃 진산의 군수로 온다는 봄바람 같은 기별을 듣고 산을 넘어 찾아가서 부탁을 했는데 그것이 칠년 가뭄 끝에 비를 만난 탕왕의 심정이었다고 했다.  

 

 흐롱 하롱하여 일 없이 다닌다고

 그 모르는 처자(妻子)는 외다 하데마는

 세상의 유정(有情)한 이귀(李貴)를 아니 보고 어찌하리.

 

 천중(天中)에 떴는 달과 강호(江湖)에 헤친 모래

 밝거든 좋지 마나 좋거든 밝지 마나

 밝고도 또 좋은 월사(月沙)와 아니 놀고 어찌하리.

 

 우계(牛溪) 죽어 있고 율곡(栗谷)도 없어 있고

 어여쁜 오성(鰲城)은 또 어디 가단 말고

 두어라 장안(長安) 월사(月沙)나 백년 살게 하소서.

 

 새 달은 밝다마는 옛 벗은 어디 간고.

 저도 달 보고 나같이 생각는가.

 달 보고 벗 생각하니 그를 설워하노라.

 

 위수양(渭水陽) 아니로되 태공망(太公望) 만나보니

 일간(一竿) 생애(生涯)에 황발(黃髮)만 표표(彪彪)한다.

 어느 제 주문(周文)을 만나 재여구귀(載與俱歸) 할꼬.

 

그의 교유를 짐작할 수 있는 다섯 편을 골랐다. 첫 수는 ‘가인견의지행가(家人牽衣止行歌)’로 이귀(李貴, 1557-1633)가 인조반정에 성공하자 그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상경을 서두른 모양이다. 그러자 처자가 쓸데없이 다닌다고 말리니 이귀와는 조상의 산소를 대신 돌보아 줄 정도로 가까운 관계임을 들어 방문하였고 부채 선물도 받았다. 둘째 수는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와 교유한 것을 읊은 ‘경증월사대감가(敬贈月沙大監歌)’ 11수 중 하나다. 월사도 이귀와 같은 연안 이씨이므로 그 문중과의 친분으로 사귀었던 듯하다. 이 시는 월사(月沙)라는 호를 풀어서 하늘의 달과 강의 모래처럼 그의 인품이 밝고 깨끗하다고 찬양하였다. 셋째 수는 시인이 흠모하고 따르는 인물들을 나열하였다. 우계 성혼, 율곡 이이, 오성 이항복, 월사 이정귀를 들었다. 모두 서인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이로 보아 그는 서인에 친밀감을 가졌거나 서인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수는 서용갑(徐龍甲)과의 우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서용갑은 서익(徐益, 1542-1587)의 서자로 양갑(羊甲)의 동생이다.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양갑이 역모로 몰려 죽자 용갑과 그 동생 호갑(虎甲)이 귀양을 갔고 그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시 속에 달을 바라보고 벗을 생각하는 애틋한 정감이 스며 있다. 마지막 수는 이미(李瀰)와 사귄 일을 읊은 다섯 수 중 하나다. 아마 동향의 처지가 비슷한 친구인 듯하다.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문왕(文王)을 만난 강태공(姜太公)처럼, 평생을 강호에서 낚시를 즐기며 머리가 반백(斑白)이 된 친구를 보고 어느 때 주문왕(周文王)을 만나 포부를 펴보겠느냐고 위로하고 있다. 함께 초야에 묻혀서 품은 바를 펼쳐보지 못한 채 늙어가는 그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심정이기도 할 것이다.   

  

 선왕(宣王)이 화선후(化仙後)에 고은 대군(大君) 어디 간고.

 어여쁜 대비공주(大妃公主)의 가슴 속에 잠겨 계셔 밤이나 낮이나 님 향해 애정(哀情)과

 회중살자(懷中殺子)를 일각(一刻)이나 잊으실까. 기한(飢寒)이 도골(到骨)하여

 팔십쇠옹(八十衰翁)은 애고애고하며 서궁(西宮)을 바라보고 눈물 질 뿐이로다.

 아무나 유정(有情)한 벗님네 저 쇠 열길하소서.

 

 계해(癸亥) 삼월춘(三月春)에 뜻 가진 이귀(李貴) 김류(金鎏)

 용천검(龍泉劍)을 둘러메고 태평케 하단말가.

 아이야 청려장(靑藜杖) 내어라 위로하러 가자.

 

 애고 애고 이 내 슬픔 어찌하면 좋을꼬.

 남한중(南漢中) 갇히신 고운 님 어찌어찌 하시는고.

 주야(晝夜)에 통곡비가(慟哭悲歌)를 알 리 없어 하노라.

 

국가와 조정에 대한 그의 견해를 살펴볼 수 있는 3편을 골랐다. 첫 수는 ‘청계통곡육조곡(淸溪慟哭六條曲)’의 하나인데 계축옥사 이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서궁(西宮) 유폐를 듣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형식은 엇시조다. 선조가 죽은 후에 영창대군이 계축옥사에 휘말려 죽은 사실을 말하고, 인목대비가 품속에서 기르던 대군을 잃고 그 슬픔이 어떠했을지 동정하여 함께 슬퍼하고 있다. 서인이 몰락하여 숨을 죽이고 있던 시절과 시골 선비의 낙백한 처지를 ‘기한(飢寒)이 뼈에 사무친다.’고 표현하여 인목대비의 유폐와 자신의 고난이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때는 그의 나이가 61살인데 ‘팔십쇠옹’이라 한 것을 보면 이 작품은 인조반정 이후 그가 팔십이 가까웠을 때 지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수는 ‘천운순환칠조가 계해반정가(天運循環七條歌 癸亥反正歌)’로 이귀(李貴)와 김류(金鎏)가 인조반정에 성공하자 이 일을 축하하고 정국을 바로잡아 달라는 자신의 소망을 드러낸 것이다. 광해조에 정권을 잡았던 정적들을 용천검으로 베어버리고 나라를 서인 중심으로 이끌어 가라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셋째 수는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전했던 사실을 안타깝고 슬픈 마음으로 읊은 것이다. 임금에 대한 염려와 슬픔이 잘 드러나 있고 자신의 충성심을 몰라주는 아쉬움도 함께 표현하였다. 이러한 시들은 정치현실에 대한 직접적 표현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이 인정된다고 하겠다.

 

 내 마음 둘 데 없어 가사를 제작하니

 정대군자(正大君子)는 다 옳다 하네마는

 어떻다 폐일부운류(蔽日浮雲類)는 이도 외다 하나니.

 

 대산(臺山) 일편석(一片石)을 세상이 버렸거늘

 낙화(落花) 진토(塵土)를 내 쓸고 혼자 노니

 건곤(乾坤)도 유정(有情)히 여겨 함께 늙자 하나다.

 

 산천(山川)을 희롱(戱弄)하여 풍경만 좋이 여겨

 화개낙엽시(花開落葉時)예 정처(定處) 없이 다니거늘

 세상은 청계변조옹(淸溪邊釣翁)을 광자(狂者)러라 하나다.

 

 청계수(淸溪水)에 목욕하고 갈마산(葛麻山)에 취잎 뜯어

 떼장에 끓여 먹고 수월정(水月亭) 흩걸으며

 주야(晝夜)에 북풍(北風)을 향하여 님만 그려 우니다.

  

 평생(平生)에 낚대 들고 청계변(淸溪邊)에 흩걸으며

 장소망월(長嘯望月)하고 돌아올 길 잊었거늘

 처첩(妻妾)은 저녁 죽 식어가니 쉬이 오라 재촉한다.

 

끝으로 전원생활을 노래한 다섯 수를 골랐다. 앞의 네 수는 ‘수월정청흥가(水月亭淸興歌)’로 무인년(戊寅年, 인조16, 1638) 정월 보름에 지은 21수 중 일부다. 첫 수는 ‘수월정가’의 서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원에 묻혀 일생을 보낸 낙백 양반의 심정을 노래에 부쳐 지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반응이 무리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정대한 군자들은 칭찬한 반면 임금의 이목(耳目)을 가리는 아첨배 곧 폐일부운(蔽日浮雲) 같은 무리들은 이 일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시골 선비 사회에도 시인의 행위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로 갈려서 조정 당쟁의 축소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가 살던 전원은 정치적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둘째 수는 시골에 버려진 것을 자탄하지만 전원 속에서 자락(自樂)하려는 자세를 보여준다. 벼슬길에 나서서 포부를 펴보지 못한 신세를 ‘대산에 버려진 한 조각의 돌’이라고 비유하고 땅위에 떨어진 꽃과 같이 논다고 자탄하지만, 우주는 그러한 자신을 측은히 여겨 함께 늙어간다고 하여 자연과의 동화에서 위안을 찾으려 하였다. 셋째 수는 이제 자연 속에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풍경을 즐기고 꽃피고 단풍지는 경치를 찾아 정처없이 다니는, 자연에 취한 시인을 제시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벼슬길에서 뜻을 펴보지 못하고 오로지 자연풍경 속에서 심정의 위안을 얻으려 하는 시인을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대개 시인은 현실적 성취에 만족하기보다는 자연 속에서 위안을 찾기 쉬우므로 그도 또한 그러하다. 넷째 수에는 전원에 사는 일상 형편을 드러내었다. 앞 시내인 청계(淸溪)에 몸을 씻고, 뒷산인 갈마산(葛麻山)에서 취나물을 뜯어서 토장에 풀어서 끓여 먹고 수월정(水月亭) 주위를 거닐며 날마다 살아가는 자신의 형편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임금을 향한 충성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한가하지만 가난한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시대현실에 대하여 보수적 충성심을 고집하는 시골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 수는 ‘수월정가’에 들어있지 않지만, 전원의 일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초장은 청계변에서 낚시로 세월을 보내는 자신의 현실생활을 그렸고, 중장에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달 보며 휘파람 부는 행위에다 부쳤다.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아쉬워하며 돌아오길 잊었다는 것이다. 종장은 일상의 가난한 생활을 일깨우는 식구들의 부름이 자아의 정체성을 각성케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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