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덕일의 시

김영도 2020. 8. 18. 22:51

이덕일(李德一, 1561-1622)은 선조․광해군 때의 무신이다. 그의 문집인 <칠실유고(漆室遺稿)>에 의하면, 자는 경이(敬而)이고 호는 칠실(漆室)이며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어려서부터 용략(勇略)이 있고 또한 학문에 힘써서 임란이 난 후, 34살(1594, 선조27년)에 문무과에 급제했으나 기용되지 못했다. 정유재란이 나자 호남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공을 세웠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막하에 들어갔다. 전쟁 후에 축성수비(築城守備)의 계책을 상소하여 이정귀(李廷龜)의 천거로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었다. 40살에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가 오위장(五衛將)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43살에 모친상을 당했고, 51살(1611, 광해군3년)에 통제우후(統制虞侯)로 임명되었으나 국정의 어지러워짐을 보고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모옥(茅屋)을 지어 칠실(漆室)이라 하고 국정의 혼란을 탄식하여 ‘우국가(憂國歌)’ 28수를 지어 강개(慷慨)한 마음을 술회하였다.  

 

 학문(學文)을 후리치고 문무(文武)를 하온 뜻은

 삼척검(三尺劍) 둘러메고 진심보국(盡心報國) 하렸더니

 한 일도 하옴이 없으니 눈물겨워 하노라.

 

 나라에 못 잊을 것은 이 밖에 다시없다.

 의관문물(衣冠文物)을 이토록 더럽힌고.

 이 원수 못내 갚을까 칼만 갈고 있노라.

 

 어와 거짓 일이 금은옥백(金銀玉帛) 거짓 일이

 장안(長安) 백만가(百萬家)에 누고누고 지녔는고.

 어즈아 임진년(壬辰年) 티끌이 되니 거짓 일만 여기노라.

 

 공명을 원찮거든 부귀인들 바랄소냐.

 일간모옥(一間茅屋)에 고초(苦楚)히 혼자 앉아

 밤낮에 우국상시(憂國傷時)를 못내 설워하노라.

 

그가 51살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전라도 함평에 돌아와 나라의 어려움을 걱정하여 지은 ‘우국가’의 서두 부분(1,3)과 결말 부분(27,28)이다. 임진왜란을 겪고 피폐해진 조국의 형편에 대한 걱정과 조국의 어려움을 구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첫 수는 자신이 학문에 힘쓰다가 문무과에 급제하여 어려움에 빠진 조국을 구해보려 했으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큰 공을 세우지 못했던 자신의 처지를 직서하고 이를 한탄한 서두이다. 인용한 둘째 수는 이 땅을 짓밟은 왜적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 것으로 의관(衣冠)은 문화를, 칼은 적개심을 형상화한 말이다. 셋째 수는 권문세가가 귀하게 여겼던 금은과 비단이 전쟁을 겪고 나자 티끌이 되고 말았다고 하여, 부귀영화에 골몰해 본들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결국 허망하게 전쟁의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는 교훈을 절감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수는 ‘우국가’의 결말로 이 작품을 쓰게 된 까닭을 풀어 놓은 것이다. 자신은 부귀공명을 바라지는 않고 고향에 돌아와 모옥(茅屋)에서 고생스럽게 지내지만 밤낮으로 걱정하는 것은 나라의 형편이라고 서술하였다.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꾸밈없이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다.

 

 성(城) 있으되 막으려 예 와도 할 일 없다.

 삼백이십주(三百二十州)에 어찌어찌 지킬 게오.

 아무리 신신정졸(藎臣精卒)인들 의거 없이 어이하리.

 

 통곡관산월(慟哭關山月)과 상심압수풍(傷心鴨水風)을

 선왕(先王)이 쓰실 적에 누구누구 보온 게오.

 달 밝고 바람 불 적이면 눈에 삼삼하여라.

 

 말으소서 말으소서 하 의심 말으소서.

 득민심(得民心) 외에는 하올 일 없나이다.

 향천년(享千年) 몽중전교(夢中傳敎)는 귀에 쟁쟁하여이다.

 

 베 나아 공부대답(貢賦對答) 쌀 찧어 요역대답(徭役對答)

 옷 벗은 적자(赤子)들이 배고파 설워하네.

 원컨대 이 뜻 알으셔 선혜(宣惠) 고루 하소서.

 

 아성조(我聖祖) 적덕(積德)으로 여경천세(餘慶千世) 하옵시니

 선왕(先王)도 효칙(效則)하사 순천명(順天命) 하시니다.

 성주(聖主)는 이 뜻 알으셔 천만의심(千萬疑心) 말으소서.

 

나라의 어려운 사정과 임금에게 백성의 형편을 살피라는 충언을 드러낸 시들로 ‘우국가’의 4, 7, 10, 11, 24번째의 작품이다. 앞의 두 수는 임란을 당한 나라의 형편과 임금의 통한을 표현하였다. 첫째 수에서 전쟁을 당해 성을 지키려 해도 병졸들이 의지할 바가 없을 정도로 군대의 체제가 허물어져서 삼백이십주 고을 마다 어찌해 볼 수 없었다고 하여 임란 당시 조선의 군사행정이 지리멸렬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가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자 이순신이 그를 불러 군기(軍機) 통제의 일을 맡겼던 만큼 그는 임란 당시 조선군의 체제를 걱정했던 것이다. 둘째 수에는 선조 임금이 의주에서 썼다는 시로 통분한 심정을 제시하였는데, 뜻인 즉 변방의 달을 보고 통곡하고 압록강의 바람 속에 상심한다는 내용이다. 나라를 짓밟히고 국경의 끝에 피란한 임금의 피맺힌 절규를 자신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뒤의 세 수는 시를 지을 당시의 임금인 광해군에게 드리는 충간(忠諫)으로 되었는데, 셋째 수는 자신의 충언을 의심하지 말고 백성의 마음을 얻는 정책을 펴라는 것이다. 천년 동안 번영을 누리기 위해 꿈속에서 선왕에게 내린 태조의 말씀은 이것밖에 없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넷째 수에는 백성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여, 백성들은 길쌈하고 농사지어 각종 세금과 부역에 시달리지만 그들은 헐벗고 배고파한다고 했다. 그러니 불쌍한 백성을 구휼하고 이들에게 선정을 베풀라고 탄원하였다. 마지막 수에서는 태조가 덕을 쌓아 오래도록 이어갈 왕조를 열었으니 선왕들도 이 뜻을 받들어 천명(天命)을 따르는 정치를 했다고 하고, 임금은 그러한 정치를 권하는 이 충언을 의심하지 말고 나라를 근심하는 뜻을 헤아리라고 했다. 왕권의 불안과 당쟁의 격랑 속에서 국정의 혼란상을 보여주었던 광해군에 대하여 충심어린 간언을 이렇게 시로 읊어냈던 것이다.     

 

 힘써 하는 싸움 나라 위한 싸움인가.

 옷밥에 묻혀 있어 할 일 없어 싸우놋다.

 아마도 그치지 아니하니 다시 어이하리.

 

 이는 저 외다 하고 저는 이 외다 하네.

 매일에 하는 일이 이 싸움뿐이로다.

 이 중에 고립무조(孤立無助)는 님이신가 하노라.

 

 말리소서 말리소서 이 싸움 말리소서.

 지공무사(至公無私)히 말리소서 말리소서 말리소서.

 진실로 말리곳 말리시면 탕탕평평(蕩蕩平平)하리이다.

 

 이 외나 저 외나 중에 그만 저만 던져두고

 하올 일 하오면 그 아니 좋을손가.

 하올 일 하지 아니하니 그를 설워하노라. 

 

 이라 다 옳으며 제라 다 그르랴.

 두 편이 같아서 이 싸움 아니 마네.

 성군(聖君)이 준칙(準則)이 되시면 절로 말까 하노라.

 

 나라가 굳으면 집조차 굳으리라.

 집만 돌아보고 나라 일 아니 하네.

 하다가 명당(明堂)이 기울면 어느 집이 굳으리오.

 

이 작품들은 점점 격화되어 가는 당쟁을 제발 그만두라는 간절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차례대로 ‘우국가’ 13, 14, 16, 18, 19, 26번째 수다. 첫 수는 옷과 밥에 걱정이 없는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지 않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당쟁을 일삼는 것을 보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는 싸움이냐고 통렬하게 꾸짖는 작품이다. 둘째 수는 당쟁의 실상과 폐해를 밝혀놓은 것이다. 서로 편을 갈라서 상대편을 틀렸다고 공격하는 일로 날을 보내니 정사를 처리해야 할 임금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고립돼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런 통탄스런 현실을 보고 벼슬을 내놓고 낙향해 버렸으니 한심한 정치현실이었던 것이다. 셋째 수에는 누가 있어 이 당파싸움을 좀 말려달라고 하소연하였다. 물론 임금에게 드리는 충언일 것이다. 지극히 공평한 입장에 서서 이들의 싸움을 말린다면 당쟁이 사라진 탕평(蕩平)한 세상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탕평책에 대한 생각이 이미 이 때에 언급되고 있다. 넷째 수는 당쟁을 하느라고 조정의 정사를 밀어둔 한심한 처사를 개탄한 것이다. 민생을 위한 정사는 게을리 한 채 정파의 세력 확보를 위한 투쟁에만 골몰하는 정치 행태를 나라의 안위를 위해 슬퍼한다고 하였다. 다섯째 수는 당파의 시비가 국가에 무익한 것임을 다시 확인하고, 설령 어느 당이 옳다한들 매양 옳은 것이 아니며 신료들은 국익을 위해 당을 초월하여 국가정책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므로 임금이 기준을 잡아서 취사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중심을 잡으면 당쟁은 그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마지막 수에서 당쟁을 그만두고 나라 일에 전념한다면 나라도 강해지고 가정도 번창할 것인데, 자신의 명리만 좇아서 나라 일은 안중에 없으니 나중에 조정이 기울어지면 가정이나 개인인들 온전하겠느냐고 하여 국가 대의(大義)를 위해 개인의 소리(小利)를 버리고 당쟁을 그칠 것을 당부하였다.

이렇게 당시로서는 상당히 시휘(時諱)에 거슬리는 뼈있는 충고를 임금과 정치권에 감연히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시인이 무인적(武人的) 용감성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의 풍자나 비판이 용납되기 어려웠던 광해군 치하에서 비록 시골에서 자탄조로 표현한 것이긴 하지만 당시의 당쟁으로 얼룩져 혼란한 정치현실을 이렇게 직접 서술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우국가’는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우국지사의  정치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직접서술로 표현된 작품이라고 하겠다. 이 노래는 훗날 이기발(李起渤, 1602-1662)에 의해 한역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인로의 시조1  (0) 2020.08.18
박인로의 시조 2  (0) 2020.08.18
강복중의 시  (0) 2020.08.18
정훈의 시  (0) 2020.08.18
신흠의 시  (0) 2020.08.18